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에 악재가 터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재벌에게 받은 불법 자금의 일부가 여의도 당사 보증금으로 사용된 것이 검찰 수사로 드러난 것이다. 대선에서 패했던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으로 너덜너덜해진 때였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 영등포 청과물공판장을 개조한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조선일보 DB

정동영 의장은 신속히 당사를 이전하기로 했다. 서민 정당 이미지를 최대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여의도에서 멀지 않은 영등포 청과물 시장의 옛 공판장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시장 속 당사.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발상이었다. 정 의장과 간부들은 그날 밤 전등을 들고 시장을 찾았다. 노숙자 몇 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한 당직자가 “쥐가 나올 것 같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 날 열린우리당은 보증금 1억원에 월 임대료 1200만원 조건으로 바로 이곳에 입주했다. 이른바 ‘청과물 시장 당사’의 시작이었다. 입주 전 쓰레기를 치웠는데, 5t 트럭 80대 분량이었다. “쓰레기장 위에 당사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전했다. 쥐가 나올까 봐 당사 전체를 소독했다.

언론에는 사람 못 살 곳처럼 설명했지만 영등포 청과물 시장과 그 주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울고 웃고 돈을 벌고 잠을 자고 아이를 키웠다. 다만 집권당의 당사가 그곳에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여당이 돈이 궁할 리도 없다. 그저 총선을 앞두고 서민 흉내를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선수를 빼앗긴 한나라당은 곧 천막 당사로 들어갔다. 가난한 척 시대의 원조, 발원지쯤 되겠다. 열린우리당은 “불법 자금에 대한 사과와 자기희생, 저비용·서민 정치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시장 당사의 강렬한 시각적 효과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했고 100년 정당을 공언했다.

영등포 당사는 예상보다 오래갔다. 청과물 시장 당사가 공식적으로 폐쇄된 것이 2013년 9월이었으니 약 9년 이어졌다. 여의도로 복귀를 결정한 당시 민주당 지도부 인사는 “10년간 당대표와 지도부가 26번이나 바뀌었고, 당명이 수시로 바뀌면서 정체성에 혼동이 있었다”고 했다. 쇼 그만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당직자는 “이 당사에선 한마디로 되는 일이 없었다”며 후련해했다. 정당이 가난한 척할 필요도 없었고, 그런 쇼가 가져온 국민적 반감과 피로감이 적지 않았다. 시장 생활을 청산한 민주당은 현재 300억원대의 여의도 당사를 갖고 있다. 시장 당사는 버렸지만 한국 진보 좌파의 혈관 어디에는 ‘가난한 척’의 피가 흘렀고 그 끝에서 김남국 의원의 코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김남국이 잊히고 다시 선거철이 되면 가난한 척 정치는 부활할 게 분명하다.

시장 당사와 관련한 기억 하나가 있다. 당시 시장 당사만 들어가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던 기자는 당사 앞에 ‘두통 클리닉’이라는 간판을 보고 병원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책상 위에는 ‘정신과 전문의’라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두통이 정신 질환인가?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왔다. “직업이?” “신문기자요.” “출입처는?” “저 앞에 열린우리당입니다.” “어디 신문?” “조선일보요.”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조선일보 기자가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니 두통이 생긴 겁니다. 출입처를 바꾸세요”라는 진단을 내렸다.

의사의 처방을 따르진 못했지만 며칠 후부터 두통이 조금씩 사라졌다. 정신과 의사의 일 중 하나가 환자의 말 못 할 고민을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가난한 척 정치의 계승자 김남국 의원 때문에 낯선 코인 용어와 매일 씨름하고 있다. 두통이 재발할 것 같아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