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보수가 거울 앞에 서야 할 때다. 선거의 계절이 막을 내렸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 선거에서 연달아 패한 민주당은 당분간 내홍을 겪을 것이다. 앞으로 선거 없는 22개월 동안 국민들의 시선은 민주당 집안싸움 구경보다는, 윤석열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에 더욱 쏠릴 것이다.

6·1 지방 선거 뒤 대통령 일성이 “여러분은 지금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못 느끼느냐”였다. 거울에 비친 윤석열 정부는 여러 면에서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와 닮았다. 한국 경제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악천후로 진입한다는 현실이 우선 그렇다. 유권자들이 진보 정권에 실망해 보수 정권 손을 들어준 선거 결과도 비슷하다. 배경도 그렇지만 등장인물까지 그 시절 인사들이 단체 출연하니 데자뷔로 비친다. 이런 인적 구성과 정책 대응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한국행정연구원이 2013년부터 펴내는 사회 통합 실태 조사는 우리 사회 저변의 흥미로운 변화를 담고 있다. 2021년 이념 판도는 보수 30.4%, 진보 22.8%로, 4년 전인 2017년(진보 30.6%, 보수 21%) 판도에서 역전됐다. 조사가 시작된 2013년(보수 31%, 진보 22.6%)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보수의 부활로 속단하기는 이르다. ‘20년 집권론’ 운운하며 오만했던 민주당 못지않은 오판이 될 수 있다. 2021년이든, 2017년이든, 조사가 시작된 2013년이든 두드러지는 건 우리 국민의 47~50%가 일관되게 스스로를 중도로 자리매김해왔다는 통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수치가 ‘성장이냐, 분배냐’에 대한 응답이다. 2021년 들어 처음으로 분배 중시(37.4%)가 성장 중시(26.7%)를 크게 앞섰다. 심지어 성장·분배 똑같이 중요하다(35.9%)는 중도적 답변보다도 높았다. 이념은 보수의 우위, 정책은 진보 선호의 이 도수 다른 안경을 쓰고 올해 선거 결과를 바라보면 섣불리 ‘보수 승리’ ‘진보 몰락’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진보 정당의 외피를 쓰고 자기편 이익에만 집착하면서 무능·무치·부도덕의 퇴행적 행태를 보인 좌파 포퓰리즘에 제동을 건 중도의 선택으로 설명하는 편이 더 적확할 듯싶다.

좌파든 우파든 민생 복리를 위해서라면 이념적 색채를 줄이고 실사구시를 향해 중도로 수렴해가는 것이 선진 정치다. 대한민국은 그러질 못했다. 경제와 국민의 교육 수준은 세계 1류인데 정당과 정치권은 4류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니 국민 절반이 중도에서 무게추 역할을 하면서 선거 때마다 폭주하는 정치에 제동을 거는 조타수 노릇을 해온 셈이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저자 얀 베르너 뮐러는 “포퓰리즘은 갈등 속에서 번창하고 정치 양극화를 조장할 뿐 아니라 정치적 반대 세력을 ‘국민의 적’으로 취급하고 배제하려 든다”고 했다.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미국 노동자들의 분노가 트럼프 포퓰리즘을 가능케 했던 것처럼 한국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왔다.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부의 양극화, 대기업 편중, 상대적 박탈감, 고용 없는 성장 등 가려 있던 그늘이 드러났다. 시대적 요구를 간과하고 이명박 정부는 성장 일변도의 ‘747 공약’을 내걸었다 뒤늦게 동반 성장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충분치 못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등에 잘 대응해 놓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작용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전체 일자리 통계는 양호했어도 점점 악화하던 청년 실업 문제에는 충분히 대처하지 못했다. 7%대이던 청년 실업률이 9%대로 높아졌다. 취약해진 경제 지반에서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유행어가 생겨나 젊은이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보수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동력 삼아 진보가 집권했지만 수권 능력의 바닥을 드러내고 갈등을 조장하다 선거에 패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청년 일자리는 별로 개선되지 못했고 집값까지 올라 분노의 ‘영끌 세대’를 양산했다. 보수 정당과 윤 대통령도 대선 과정에서 갈등을 유발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일자리도 집도 기회도 부족해 격노하는 20대를 남녀로 갈라치기했다. 득표에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5년 만에 재집권한 보수 정부가 어떤 모습으로 국정에 임해야 할지는 지난 정권을 반추하고 차별화하면서 답을 얻어야 할 것 같다. 예전에 알던 숙련공 몇 명 불러다 물 새는 지붕 개보수하듯, 측근 지인 중심의 인사들로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개보수하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비 맞으며 경제 폭풍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국민이 다른 모든 사안을 너그러이 참아주기에는 민생이 너무 퍽퍽하다. 집권 후 초록동색 인사로 일관하다 외신 한마디에 우당탕 여성 숫자를 채워 넣었다. 미래를 밝혀줄 것 같은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등용하면서 포용적이고 혁신적인 새 보수의 국정을 보여주기에는 아직 윤석열 정부가 갈 길이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