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큰 정부’를 줄이는 게 이명박 당선인의 목표였다. 2008년 1월 28일, 퇴임을 28일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 “나는 5년 동안 근거 없는 의혹 제기, 논리도 없는 반대 때문에 힘들었다. 당선된 정부니 눈감고 무조건 밀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서명하는 것은 그동안 정부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가 될 것….”

노무현대통령이 2004년 3월 12일 오전, 경남 창원시 (주)로뎀에서 철차공장을 둘러본뒤 국회에서 통과된 대통령 탄핵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선DB

‘아름다운 퇴장’ 같은 건 없다. 원수에게 보물을 내주는 심정일 것이다. 마지막 한 방울 권력까지 짜내 후임자를 골탕 먹이는 경우도 있다. ‘전·현직 대통령 미담 제조국’ 미국에서도 조잡한 일이 많았다. 수십 년 전, 퇴임 직전 대통령이 백악관 화장실을 고쳤다고 한다. 서서 일 보는 소변기를 다 좌변기로 바꿨다. 보행 장애가 있는 후임이 소변 볼 때마다 고생하라는 심보였다.

대통령을 둘러싸고 ‘주사파 운동권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나올 때였다. 대통령 지근거리 인사가 했다는 말은 이랬다. “모르는 소리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말로 이길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민정수석, 비서실장 경험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 교육 문제를 들고 가면 부동산, 세금 문제로 반박하는데 일개 장관이 어떻게 생각을 뒤집나.” 반신반의했다.

25, 26일 방송된 3시간 분량의 문재인 대통령 대담을 보는 데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래도 의미 있었다. 일문일답형 기자회견에서 볼 수 없던 표정, 몸짓 등 여러 시그널이 등장했다. 5년의 궁금함이 많이 풀렸다.

퇴임 12일을 앞두고 방송된 '대담-문재인의 5년' 방송 화면. 대통령의 선거 불개입 원칙을 두고 설전이 오갔다. /jtbc 화면 캡처

지지율 40%대의 문 대통령은 대선 패배 원인이 ‘정권 심판’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저는 한 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손석희 진행자가 한 번 더 “현직 대통령이 링 위에 오를 수 없는 건 룰”이라고 말하자, 대통령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별로 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의 선거 중립’은 규정이 애매하고, 지키기도 어렵다. 그래도 우리 헌법은 그러라고 한다. 대통령 직무가 63일간 정지됐던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도 총선 개입 발언이 화근이었다. 2월 13일 청와대를 관두고 네팔로 여행 갔던 문재인 전 민정수석은 바로 귀국해 법률대응단을 이끌었다.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몸소 겪었다. 그러고도 ‘룰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무현은 틀리지 않았다’는 고집일 게다.

가장 인상적인 말은 따로 있었다. “대한민국의 정의를 특정 사람들이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늘 항상 저쪽이 문젠데, 이쪽이 훨씬 작은데….” ‘정의는 내 거야, 너희는 더러워’ 기자는 이렇게 듣고 말았다.

집권 세력은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마저 독점했다. ‘이쪽’ 정의에 어긋나면, ‘저쪽’은 바로 적폐가 됐다. 정책도, 인사도, 수사도, 방역도 그렇게 했다. 잘못됐다고 지적하면 “너희들은 더했다”고 했다.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계속 떠오른다. 아도니스의 미모를 가진 도리언은 자기 초상화 앞에서 몸 대신 그림이 늙기를 바랐다. 소원대로 ‘영원한 스무 살’ 청년으로 살며 많은 죄를 지었다. 사람 대신 그림이 늙고 추악해졌다. 초상화를 마주한 그는 분노해 그림을 칼로 찢지만, 그의 몸에서 진짜 피가 흘렀다.

젊음, 미모라는 단어 대신 ‘정의’를 넣어본다. 집권 세력은 인생에서 가장 괜찮았을 한 순간을 박제해 초상화로 모셔두고, 현실에서는 다른 삶을 살았다. 추하다고 비판하면, 내 초상화 못 봤냐고 화냈다.

권력을 놓는다는 건, 추해진 자기 초상화를 대면하는 일일 것이다. 어떤 팬덤, 아부꾼, 지지율도 그걸 대신 해주지 못한다. 지금은 대통령 감정이 가장 격한 시간일 것이다. ‘잊히고 싶다’ 같은 과잉의 언어도 필요 없다. 퇴임 후 평상심을 찾은 대통령이 자기 초상을 담담히 대면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