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이 정리한 김정숙 여사 의상 목록의 일부. /디시인사이드

김정숙 여사 옷값에 대한 청와대 해명은 2년 전 법원에 제출한 서면 진술과 배치된다. 논란이 커지자 뒤늦게 해명에 나선 청와대는 정부 예산으로 옷·장신구를 구입한 일이 없다고 밝혔다. 협찬 같은 극소수 예외를 뻬면 모두 대통령 사비(私費)를 썼다며 “정부의 어떤 비용으로도 옷값 등을 결제한 적이 없다”(탁현민 의전비서관)고 단언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2019년 12월 한국납세자연맹의 정보 공개 청구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과 영부인 내외의 의상·액세서리·구두 등 의전 비용은 (중략) 정상회담·해외 방문·외빈 초청 등 공식 행사 부대 경비로 최소한의 수준에서 일부 지출이 될 수 있습니다.’ 옷·장신구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일부는 예산으로 구입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2018년 7월 납세자연맹에 보낸 답변서에도 똑같은 내용이 들어가 있다. 청와대는 재판 내내 ‘일부 예산 지출’이란 입장을 유지했고 재판부도 이를 전제로 판결을 내렸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전액 사비”라고 말을 바꿨다. 어느 쪽이 거짓말인가. 기자 개인적으론 언론에 등장한 것만도 코트 24벌, 롱재킷 30벌, 원피스 34벌, 투피스 49벌, 한복 노리개 51개, 목걸이 29개, 반지 21개, 브로치 29개에 달하는 의상비를 다 대통령 월급으로 샀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사비냐, 예산이냐는 지엽적 문제일 수 있다. 핵심은 국민 눈을 가리고 심지어 속이려 드는 권력자의 행태다. 옷값 논란은 2018년 6월 납세자연맹이 정보 공개를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내역을 밝히면 끝날 일이었으나 청와대는 공개를 거부하고 소송까지 하면서 4년 가까이 버텼다. 하루 4번 옷을 갈아입은 일이 있을 정도인 대통령 부인의 패션 집착증이 끊임없이 입방아에 올랐지만 청와대는 모르는 양했다. 어떤 행사에선 진주 반지를 낀 김 여사가 반지 알을 손가락 안쪽으로 돌리는 장면이 목격됐다.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지루한 재판 끝에 옷값을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오자 청와대는 항소했다. 그리고 최장 30년간 비공개되는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하겠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걸까.

‘문재인 청와대’에선 우리가 모르는 일이 참 많이 벌어졌다. 2018년 울산시장 선거 때는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비서실 8개 부서가 총동원돼 개입했다. 윤석열의 검찰이 수사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다.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은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되냐”는 대통령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이 역시 최재형의 감사원이 밝혀낸 사실이다. 해외에 나갔다던 대통령 딸 가족이 귀국해 1년 넘게 청와대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청와대 비서실장은 “확인해 드릴 수도,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국민은 몰라도 된다는 저 오만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통령의 언동엔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자리 참사에도 “고용의 양과 질 모두 개선”이라 하고, 미친 집값 앞에서도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했다. 소득 주도 성장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데도 “정책 성과가 나고 있다” 하고, 핵·미사일로 협박하는 김정은을 향해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결단력 있다”고 했다. 대통령 혼자 상상해서 지어냈을 리 없다. 누군가 대통령의 귀를 잡고 왜곡된 정보를 입력시켰을 것이다. 측근들의 세계관은 조선 왕조를 방불케 했다. 대통령을 ‘세종대왕’에 견주고 ‘문재인 보유국’ 운운하는 숭배와 찬양을 쏟아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권력 내부 일화들이 전해질 때마다 청와대 저 깊은 속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문재인의 청와대는 구중궁궐이란 표현이 딱 맞았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채 국민 인식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공간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청와대에서 근무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절감’을 말한다. 들어가는 순간 세상과 동떨어져 외부와 차단됐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 공간적 속성이 권력자와 측근들을 현실에서 고립시키고 국민과 괴리시켰을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굳이 세금 써가며 옮길 이유가 뭐냐고 한다. 그러나 공간을 바꿈으로써 문재인 청와대가 범했던 숱한 판단 오류 중 하나만 시정될 수 있어도 비용은 뽑고도 남을 것이다. 청와대가 집무실 이전을 못 도와주겠다며 내세운 ‘안보 공백’ 논리가 기막힐 뿐이다. 적어도 구중궁궐 속에서 ‘북한 비핵화’의 환상에 빠져있던 청와대가 그런 말 할 자격은 없는 것 같다. 왜 청와대를 탈출해야 하는지, 문재인의 청와대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