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신냉전 체제의 여파로 양 진영 사이에 정치·경제적 장벽이 점차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의 대외무역 중심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겨 가고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무역 흑자를 견인하던 한중 무역이 지난해 180억달러 적자로 반전되었고, 반면에 대미 무역은 444억달러의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하면서 8대 대미 흑자국 반열에 올랐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 전쟁에 따른 반사적 수혜의 결과다. 대중국 무역 적자를 대미 무역 흑자에서 보전하게 된 건 반가운 일이나, 대미 흑자국들에 대한 응징을 벼르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가능성이 점증함에 따라 기쁨만큼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은 무역뿐 아니라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울리고 있다. 금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때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나, 한국 외교는 미국-유럽-일본과 중국-러시아가 대립하는 신냉전 체제 진영 대결의 교차로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대북한 자세는 자못 의연해졌으나, 중국과 러시아 앞에서 왠지 움츠러드는 고질적 타성엔 큰 변화가 없다.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대중국, 대러시아 정책이 큰 변화를 이루는 듯했으나, 이를 입증할 구체적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트럼프 대통령이 복귀하면 4년 전 갈등이 재연될까 우려스럽다.

남중국해, 대만, 중국 인권,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전쟁 등 자유 민주 진영의 핵심 현안 어디에도 한국의 모습은 없다. 한국은 미국의 아·태 동맹국 중 중국의 남중국해 불법 점유에 항거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에 불참하는 유일한 나라고, 미국과 일본이 참전을 공언하고 있는 대만 사태에도 철저히 무관심하다. 작년 말 유엔총회에서 자유 민주 진영 51국이 공동 발표한 신장 위구르 인권침해 규탄 성명엔 중국이 두려워 홀로 불참했고,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도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해 불응 중이다.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앞장서 참여하고 대만 전쟁 발발 시 참전을 공언하는 일본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우방국도 중립국도 아니다. 그들은 1950년 북한의 남침 전쟁에 동참했고, 지난 30년간 북한의 핵무장 비호와 유엔 대북 제재 유명무실화에 앞장서 왔으며, 천안함 폭침 때도 북한을 일방적으로 두둔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대량의 북한산 무기와 러시아산 무기 기술을 교환하는 불법 거래에 이어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기능 약화에도 앞장서는 등 북한의 핵무장 지원에 누구보다 열성이다. 중국은 중화제국의 영광을 되찾아 한국을 속방으로 거느릴 날을 꿈꾸고 있고, 그 유일한 걸림돌은 미국의 군사력뿐이다. 그럼에도 불구, 신냉전의 혼란스러운 질곡 앞에 선 한국 외교는 아직도 두 나라 눈치를 보며 외교적 모호성과 균형 외교의 미몽 속을 헤매는 모습이다.

중국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겠다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와 대만은 자유 민주 진영은 물론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도 긴요한 요소다. 따라서 한국은 자유 민주 진영의 일원으로서 그 방어를 위한 대의에 동참해 응당한 기여를 제공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미국 외교·안보 싱크탱크의 아시아 전문가들은 한국이 중국에 대한 저자세를 버리고 전략적 이익이 걸린 대만 문제에 적극 관여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친이 한국전쟁에 16개월 참전했다는 미국 태평양 육군사령관 찰스 플린 중장은 최근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대만 유사시 한국군이 동맹의 힘을 보여준다면 기쁠 것”이란 희망을 표명했다.

한국이 약소국으로서 동맹국과 선진국의 일방적 시혜를 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신냉전의 여파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이 대폭 감소한 만큼, 경제적 이유로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명분도 사라졌다. 세계 10대 경제국, 6위 군사 강국의 지위는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원칙과 가치관을 지키고 그에 따른 의무도 희생도 감내해야 국제사회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이 진정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다면 이 첨예한 신냉전의 격전지에서 자신이 자유 민주 진영의 일원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명확히 입증해야 한다. 지금처럼 엉거주춤하며 양쪽 눈치를 보다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가 현실로 다가올 때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