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체포특권은 의회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불체포특권은 총칼을 앞세워 국회의원을 체포하고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 드는 독재자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의회주의를 지켜주는 최후의 방파제다.

이재명과 민주당의 앞날은…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본인의 체포동의안 상정에 대한 신상 발언을 마친 뒤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대표는 신상 발언에서 “아무리 깊어도 영원한 밤은 없다. 매서운 겨울도 봄을 이기지 못한다”며 “진실의 힘을 믿겠다. 국민과 역사의 힘을 믿겠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문제는 불체포특권이 의회주의를 지켜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독재자가 힘으로 의회를 짓밟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상대, 법을 지키지 않기로 작정한 누군가에게, ‘헌법에 보장된 의원 불체포특권을 존중하라’고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는 이런 현상을 ‘불체포특권의 역설’이라 불러볼 수 있다. 불체포특권이 전제하고 있는 상황은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비상 상태이기 때문에,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불체포특권으로 헌정 질서를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홍콩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국의 법질서를 따라 홍콩기본법을 만들었다. 그 속에는 당연히 불체포특권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이후 홍콩 민주파 야당 국회의원들은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몇 달간 ‘실종’되거나 심지어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홍콩기본법은 한낱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글씨로 전락하고 말았다.

불체포특권의 역설은 이게 끝이 아니다. 반대로 의회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을 때 불체포특권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선 후보까지 했던 유력 정치인이 황급히 국회의원직을 얻고, 당대표까지 거머쥔 후, 본인을 위한 방탄 국회를 열었던 모습을 우리가 방금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본인에게 칼끝이 향하자 “강도와 깡패들이 날뛰는 무법천지가 되면 당연히 담장이 있어야 하고 대문도 닫아야 한다. 상황이 참으로 엄혹하게, 본질적으로 바뀌었다”며 불체포특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것은 ‘내로남불’이라고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는 불체포특권의 역설을 온몸으로 구현했던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검수완박 밀어붙이듯 불체포특권을 폐지하거나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국회의원을 잡아 가둘 권력을 손에 넣기 직전까지 갔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는 낙선했고, 불과 석 달 만에 재보궐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다. 결국 국회는 ‘이재명 체포동의안 정국’에 빠졌고 투표 이후에도 허우적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정치를 보며 국민들이 불체포특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에 빠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갤럽이 21~23일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 따르면, 불체포특권 폐지에 찬성하는 응답이 57%로 절반을 넘겼다. 반면 불체포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7%에 머물고 있다.

필자는 27%에 속한다. 헌법에 못 박혀 있는 불체포특권을 없애거나 축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 누군가 헌법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초법적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면 불체포특권은 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대통령 될 줄 알았던 이재명 후보의 의기양양한 발언을 곱씹어 보자.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래서 ‘합법적’으로 불체포특권을 약화시켰다면, 1987년 이후 지속되어온 대한민국의 민주적 전통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장 군사 쿠데타를 걱정해야 할 나라에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포퓰리스트가 철권 통치의 주역이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강도와 깡패들이 날뛰는 무법천지”를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불체포특권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때 그것을 남발하면 오히려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지는 극약처방이다. 이번 체포동의안 투표 결과를 두고 어떤 해석이 오가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이재명 체포동의안 정국’을 끝내고 민주당, 더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이 정직하고 겸허하게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