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 2만1693점이 보관돼 있다. 운 좋게 수장고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분청사기부터 불상, 목가구, 고서에 이르기까지 1, 2층에 나눠 진열된 모습이 자체로 장관이었다. 선사시대를 아우르는 수집의 폭도 놀랍지만 귀고리, 연적(硯滴) 하나도 일일이 한지로 감싸 오동나무 상자에 앉힌 모습에 탄성이 나왔다. 수장고 관리자는 “삼성에서 보내온 그대로다. 유물이 훼손되지 않게 최적의 온·습도로 관리해 박물관 손이 다시 갈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진기한 물건도 잘 꿰어야 보배! 지난 28일 폐막한 이건희 특별전은 2만개의 구슬을 어떻게 꿰어야 세상이 놀랄 걸작이 되는지 일깨웠다. 이건희·홍라희 부부의 안목이라 그저 내놓기만 해도 관람객은 몰려오겠지만, 박물관은 그 편리한 관행을 거부했다. 전시에 ‘어느 수집가의 초대’란 제목을 붙인 이유다.

실제로 누군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서듯 전시는 시작된다. 차향 감도는 대청마루엔 소반과 찻잔이, 햇살 노는 마당엔 동자석들이 웃으며 ‘길손’을 맞는다. 사랑방도 격조 있다. 벽면 한쪽을 서가로 꾸미고 책들 사이사이 바둑돌과 벼루, 망건통 같은 물건들을 배치해 ‘책가도(冊架圖)’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연출했다. ‘모네의 수련’이 핀 연못을 지나 범종 앞에 멈춰선 관람객도 많다. 에밀레 전설 깃든 성덕대왕 신종 소리가 뭉근히 울려 퍼지면 속세의 요동치던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다. 이 전시를 23만명이 보고 갔다.

중앙박물관의 파격은 처음이 아니다. 앞서 ‘사유의 방’을 히트시켰다. 무슨 특별전 아니면 수장고에 잠들어 있을 반가사유상 두 점을 언제든 볼 수 있게 문턱을 없앤 것이 대중을 감동시켰다. 유리진열장 밖으로 나온 국보를 만나러 온 이들은, “깨달음의 순간 힘을 주었다”는 미륵보살의 발가락까지 찬찬히 살피며 즐거워한다. 작은 흠이라도 생길라 강화유리로 막아놨던 유물 제일주의, 공무원 편의주의를 버리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 탄생했다.

고인 물의 상징이던 전통문화 분야에서 혁신이 활발한 것도 흥미롭다. 한국관광공사가 제작한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는 박제된 전통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와 대히트한 경우다. 한국 홍보 영상 하면 으레 등장하던 불국사, 부채춤, 비빔밥 장면부터 걷어냈다. 대신 ‘범 내려온다’로 대표되는 퓨전 국악과 앰비규어스의 도깨비춤을 버무린 ‘조선식 힙합’으로 글로벌 세대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유명 관광명소 대신 호미, 포대기, 진돗개 등 골목과 서민들의 삶을 녹여낸 시리즈는 조회수 6억을 돌파하는 괴력을 뿜어냈다.

전통에 새 옷을 입힌 동력은 세 가지다.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공감력, 익숙함과 결별하려는 ‘똘끼’,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하는 리더십이다. ‘사유의 방’은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박물관에 가듯 반가사유상을 보러 세계인들이 우리 박물관을 찾게 하겠다”는 민병찬 전 관장의 통 큰 포부에서 시작됐다.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를 만든 관광공사 오충섭 팀장은 스스로를 “또라이”라고 했다. “사표를 내면 냈지 한류스타 앞세워 쉽게 가는 홍보는 안 한다”고 선언한 그는 도시, 골목, 힙합 전문가들을 찾아 전국을 뛰었다. 창의만 갖고 될 일도 아니었다. 이건희 특별전을 성공시킨 이수경 학예관과 이현숙 디자이너는 “10개 안을 놓고 끊임없이 논의하다 선택한 11번째 안이 이번 전시”라고 했다. 단순 호사가의 취미로 치부됐을 전시가 옛사람들의 경험과 지혜, 미감이 담긴 물건들을 다각도로 모아준 수집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장으로 격상된 이유다.

그러고 보면 이 맹렬한 노력이 가장 절실한 곳이 요즘 대통령실이다. 홍보라인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아직 안갯속인 듯하다. 오충섭 팀장은 “현재 대통령실은 내가 누군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자산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그것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홍보는 보여지는 것이지만, 광고 같지 않아야 먹힌다는 것이 포인트”라고도 했다. 디지털 시대 원주민들이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노자부터 메타버스까지 1년에 1000권의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의 카톡 프로필 문구가 촌철이다. ‘묵이식지: 나대지 말고,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 최고 엘리트들이 포진하고도 국민의 가슴을 울리는 사진 한 장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통령실에 ‘도깨비’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