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박범계 법무장관은 신현수 민정수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두 ‘패싱’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 당부를 했다’고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박 법무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박주민 의원 등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며 반발하는 상태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재인 허수아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치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 없이 휘둘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강화 도령’ 철종처럼, 문 대통령을 자리에 앉혀놓고 조종하는 특정 세력이 막후에서 현 정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선 실세’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청와대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소스’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와 권력의 생리를 놓고 볼 때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연합군과 소련군 양쪽의 압박을 받아 함락 직전이던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상당수의 부하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일부는 아예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나갔다. 왜일까?

히틀러는 베를린을 떠나거나 항복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적의 천재 전략가 히틀러 총통’이라는 대중의 환상이 깨진다. 그것은 권력의 붕괴를 뜻했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놀이를 하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본인은 총통으로서 죽을 테니 말이다.

문 대통령의 모든 것을 히틀러와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외우내환과 사분오열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이익을 지키는 어두운 권력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사례가 좀 더 잘 와닿을지 모르겠다.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갈등을 철저히 활용했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청군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제를 불러들였고, 개화파의 힘이 커지자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결국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그 일가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황족에 준하며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얼핏 보면 무능한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와 신하들, 침략하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끌려다닌 것 같지만, 최후의 승자는 고종이었다.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박범계 대 신현수, 유영민 대 김경수 등의 갈등 구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할 때 드러났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실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건영 의원의 말마따나 현 정권의 힘은 이 와중에도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 지지율에서 나온다. 지지의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문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하고 서툴 수는 있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현 정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믿었던 부하들조차 말을 듣지 않는 외로운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은 오히려 동정표를 보내고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틀어박힌 채 고립무원의 지도자상을 연출하며 권력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국토부가 반기를 들자 당장 부산을 방문해 “조속한 입법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라. 문 대통령은 ‘패싱’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수동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연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 ‘팩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도 ‘패싱’당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