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대표·前 정보통신부 장관

1990년대 초 인터넷이 촉발한 정보화 혁명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 수출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반도체와 휴대폰, 각종 전자 제품이 수출의 30% 이상, 연간 성장률의 40% 정도를 차지하면서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과정에서 ‘과대 선전(hype)’에 따른 투자 손실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999년 Y2K 소동이 대표적 사례다. 컴퓨터 시계 표시 방법이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앞의 두 자리가 19로 고정되어 있어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경고였다. ‘고속 열차나 비행기 이착륙 시각 표시가 잘못되어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 타이머가 오작동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전 세계가 긴장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수많은 컴퓨터를 신형으로 대체하고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지나갔지만 과연 그 시계 표시 방식이 그런 문제를 야기했을까? 컴퓨터 회사나 소프트웨어 회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과대 선전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건 아닐까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2000년대 초 기업 이름 앞에 i나 e를 붙이고 닷컴(.com)이란 도메인만 있으면 투자자가 몰렸던 현상도 다르지 않았다. 2002년 이 거품이 꺼지면서 손실을 입은 투자자가 넘쳐났다. 그 후로도 ‘웹 2.0’ ‘○○ 3.0’,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 사업, SNS와 녹색 성장 등 알쏭달쏭한 전문용어를 쓰는 사업 모델과 정책이 쏟아지고 사라졌다.

최근 유행을 부른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역시 시대적 거품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배경으로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자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간단하게 송금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이 원장을 공유하고 관리해 신용도를 올리고 이중 결제를 방지할 수 있는 금융 결제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등장했다. 이를 해소하려 한 게 블록체인이었다. 퍼즐 게임 형식의 암호화 숫자를 찾는 데 어마어마한 계산 용량과 전력을 들여야 했고, 먼저 해답을 찾은 사람한테 보상으로 준 게 비트코인이다. 이를 블록체인 내에서 결제 수단으로 만들었다. 비트코인 발행량은 2100만개로 제한을 둬 법정화폐와는 달리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 ‘금보다 낫다’ ‘법정화폐를 대체한다’는 등 과대 선전이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비트코인 광풍이 불었고 내재적 가치가 거의 없는 비트코인은 2018년 초 개당 2500만원에 시가총액 300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엉성한 사업 계획서 몇 장으로 투자금 수천억원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코인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묻지 마 투자’가 줄을 이었다. 당시 사업 모델을 보면 블록체인이 ‘가로등을 끄고 켠다’ ‘지자체 지역 화폐를 만들어 복지 사업을 한다’는 등 수익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부실한 내용이 넘쳐났다. 법정화폐를 대체한다고 큰소리쳤으나 화폐 대신 사용하기에는 불편해 실질 거래는 전무했다. 하지만 이미 발행한 코인은 여전히 투기성을 띠고 거래되고 있다.

현재 4차 산업혁명,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 코로나19 사태에 편승한 바이오 산업들은 또 다른 과대 선전 양상을 띤다. 총리급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아무 실적도 없고 AI와 빅데이터에 국가 정책 역량을 과도하게 쏟아붓는 쏠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연구·개발 과제를 따려면 ‘AI나 빅데이터란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냉소적 반응도 있다. 최근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20조원 규모 뉴딜 펀드 역시 비대면 IT와 태양광 등에 치우쳐 있다. 코로나19를 맞아 지원 대책으로 막대한 재정을 투입한 결과, 급팽창한 시중 유동성을 중소기업에 투자 자금으로 유도하겠다는 명분은 좋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정부 시책은 투자할 기업 여건과 투자금 불균형을 유발해 기업 가치에 거품을 형성하고 결국 투자 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용처 역시 현재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조선, 자동차, 화학 분야 등 전통 제조업 경쟁력 제고는 외면하고 있어 구조 조정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우리는 지속적 성장을 위한 경제정책이 필수적이고 정부 역할도 막중하다. 정부 정책이 재정과 금융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기술 발전을 이해하고 과대 선전과 유행을 쫓아다니지 않는 미세 산업 정책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산업 전체를 균형적이고 지속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컨트롤 타워, 이른바 ‘산업 부총리’ 제도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