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의 오랜 인연을 끊은 지 100일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그걸 꼬박 세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임신 사실을 짐작한 날부터이니, 알코올과의 절연 기간을 세는 것은 곧 태아의 성장 기간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그 좋아하던 술을 하루아침에 끊었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모성인가.’ 아무도 해주지 않는 칭찬을 스스로 하고 나면 기분이 꽤 나아지는 것도 같다.

출산 예정일까지 남은 날을 세어보는 것 역시 새로 생긴 습관이다. ‘그날이 오면, 남편에게 미리 준비시켜둔 차가운 샴페인을 마시며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고 나의 노고도 치하해야지.’ 출산병원에서 산후조리원까지 이동하며 샴페인을 마실 생각을 얼마나 여러 번 했던지, 꿈에도 이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이 야심 찬 계획은 다른 이들에게 공개할 때마다 산산이 무너진다. “너, 모유 수유 해야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이면 열 똑같은 얘기를 한다. 철없는 예비엄마는 열 달 만에 손에 쥔 술잔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뺏긴 기분에 날카롭게 반응하곤 한다. “어우,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새끼 밥을 왜 네가 걱정해?”

모유 수유 얘기를 꺼낸 이들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잘 안다. 갓 출산한 산모, 갓 태어난 아기의 건강을 염려하는 일상적 관심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지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유 수유를 ‘기준점’으로 놓는 사회 통념은 모성을 죄책감과 연결시키는 효과를 내는 탓이다.

“분유 먹이려고?” “병원에서 수유 못한대?” 이 문장들은 모두 같은 대전제를 깔고 있다. ‘엄마라면 응당 아이에게 모유를 먹여야 한다.’ 이는 건강이나 업무 등 다양한 이유로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산모에게 ‘당신은 모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다름없다. “모유를 먹여야 애가 건강하다던데”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얘길 우리 엄마한테 하면 “얘, 너네 낳았을 땐 프리미엄 분유가 유행이라 다 그거 먹였어!”라며 깔깔 웃는다.

원료 수급 문제로 ‘분유 대란’이 일어난 미국에서도 지난달 비슷한 이유로 논란이 일었다. 한 유명 배우가 분유 부족 사태의 해결책으로 “무료”이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 “모유”를 제시한 탓이다. 평소에 그가 모유 수유에 도덕적 우위를 뒀을 것이란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2년 전쯤 국내에선 산후조리원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화제였다. 드라마 속에서 ‘완모(완전한 모유 수유)’ 하는 엄마는 ‘일등칸’ 엄마고, ‘완분(완전한 분유 수유)’ 하는 엄마는 ‘꼬리칸’ 엄마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도 맘카페에선 ‘시어머니가 무조건 완모 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죠?’ ‘남편이 분유 먹이길 거부합니다’와 같은 글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체감컨대 사람들이 정해놓은 모성에는 분명 계급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선선한 가을날 갓 태어난 나의 아이를 안고 샴페인 마시는 꿈을 꾼다. 아직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지만, ‘꼬리칸’에 들어가도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을 작정이다. 자진해서 들어간 꼬리칸은 계급일 수 없다. 내 아이도 남이 정한 ‘모성 계급’에서 벗어나는 걸 좋아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