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춘천마라톤에서 참가자들이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이번 올림픽에선 축구, 야구보다 마라톤을 꼭 보려고 한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관심 갖게 된 종목이다. 마라톤 시상식은 특별히 폐회식에서 진행하는 올림픽의 전통에 대해서도 처음 알았다. 육상의 꽃이 100m 결승일지라도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인 것이다.

어릴 때 휴일이면 아버지 옆에서 각종 운동 경기 중계방송을 봤다. 야구가 흥미로웠고 권투는 조금 무서웠으며 마라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지루한 걸 보다니. 그때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 나는 케냐의 킵초게가 인류 최초로 2시간 벽을 깨는 장면을 매일 유튜브에서 보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역주(力走).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만 생각했을 것이다. 100m당 17초라는 페이스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을 만큼 빠른 것인지 아는 지금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마라톤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스포츠다.

육아 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나는 아무 때나 짬 나면 바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고 그게 달리기였다. 처음엔 1㎞가 벅찼는데 어느 순간 10㎞를 뛰고 있었고 하프 마라톤 거리도 달리게 됐다. 빨리 달리지 못하는 초보 러너에게도 조금씩 멀리 달리는 기쁨이 있다. 코로나가 물러가고 언젠가 마라톤 대회가 다시 열리면 풀코스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달리기를 해 보니 이 운동이 왜 영적(靈的)인 측면에서 자주 언급되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달리기는 타인과의 경쟁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다. 또한 달리면서 뭔가를 던지거나 차거나 휘두르지 않고, 아마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 몸짓일 질주에만 집중하는 순수한 몰입이다. 장거리 달리기의 대표 종목인 마라톤은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고통과 환희 사이를 오가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긴 여정이 인생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도 마라톤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라톤은 가장 공정한 스포츠다. 비싼 장비나 잘 정돈된 경기장이 필요 없고 운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축구에 골대 불운이 있고 야구엔 행운의 안타가 있듯이 어떤 스포츠엔 통제 불능의 운이 작용한다. 운때가 맞으면 주말 골퍼도 홀인원을 하지만 풀코스를 4시간에 뛰는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운 좋게 서브 스리(3시간 이내 완주)를 할 수는 없다.

주로(走路) 밖의 세상도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어린이 건물주라든가 청소년 주식 부호, 부모 찬스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같은 출발선에 서서 오로지 맨몸으로 경쟁하는 마라톤을 생각한다. 작년 비대면 춘천마라톤 참가자의 56%가 20·30대였다. ‘아재 운동’ 이미지였던 마라톤에 MZ세대가 관심을 보이는 건 이들이 중시하는 공정의 가치와도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집안, 배경, 학벌 다 떠나서 스마트폰 기록 앱에 찍힌 숫자로만 이야기하는 정직한 운동.

그러면서도 마라톤은 모든 사람을 등수로 줄 세우지 않는다. 많은 마라톤 대회에 엘리트(선수)와 동호인이 함께 참가한다. 이들을 모두 같이 골인하게 하거나 잘 뛰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건 공정이 아니다. 다만 선두를 차지한 이에겐 합당한 영예를,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도 저마다 성취를 이룩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방송사의 마라톤 중계는 선두 그룹을 비추지만 일반 참가자들이 찍은 영상은 그 뒤의 이모저모를 보여준다. 며칠 전에 본 영상엔 두 팔이 없는 장애인 러너, 쫄쫄이 옷을 입은 스파이더맨이 등장했다. 모두 주인공이다. 우승을 노리는 사람, 자기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 그저 완주가 목표인 사람, 이색 분장을 하고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 모두에게 마라톤은 축제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러너들의 물결을 바라보며 잠시 마라톤 같은 세상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