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1861~1865)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내전이었다.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기록한 전쟁이기도 하다. 펜실베이니아주(州) 남부의 게티즈버그는 그런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된 결정적 전투의 현장이다. 우리에게는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표현이 포함된 연설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의 게티즈버그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작은 도심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고 한가로운 평원에는 참전자와 희생자를 기리는 수많은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남북전쟁 당시에 썼던 대포와 나무로 된 엄폐물들도 곳곳에 놓여 있다. 걷는 건 힘들다. 차로 돌아도 중요한 곳을 다 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기념비와 동상 중 가장 인상적인 건 펜실베이니아 기념비다. 거대한 개선문이다. 이에 필적하는 건 버지니아 기념비다. 규모는 작지만 인상적이다. 기념비의 상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한 장군의 기마상이다. 그는 조용히 북군의 진지가 있었던 곳을 응시하고 있다.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1807~1870). 게티즈버그 전투의 주역이었던 남부군 사령관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현장에 세워진 버지니아 기념비는 남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기마상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던 리 장군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남부는 사실상 남북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상실했다./게티이미지뱅크

워싱턴의 후예 리 장군

로버트 리는 버지니아 명문(名門)의 후손이다. 그의 가문은 리처드 리 1세(Richard Lee Ⅰ·1617~1664)가 1639년 버지니아로 이민 온 이후 대대로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리의 아버지 헨리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버지니아주의 주지사까지 지냈다. 리는 남부 명문가의 전통에 따라 육사에 진학했고 차석으로 졸업했다(1829년). 졸업 후 리는 메리 랜돌프 커스티스(Mary A. Randolph Custis)와 결혼했다. 그녀는 국부 조지 워싱턴의 양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1781~1857)의 유일한 딸이었다. 결혼을 통해 리는 조지 워싱턴의 법통을 이어받게 된 셈이다. 리가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건 1846년에 터진 멕시코 전쟁이었다. 리는 이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과 용기를 선보였고 특진을 거듭해 대령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능력, 가문의 명성, 처가의 후광으로 인해 리는 군부 내에서 단연 돋보였다.

리 장군, 남부를 선택하다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링컨이 북군 사령관으로 리를 생각했던 건 당연했다. 조지 워싱턴을 마치 신처럼 떠받치는 나라에서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군대를 이끈다면 이보다 완벽하게 북부의 대의명분을 상징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리는 탁월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기대와 달리 리는 남부를 선택했다. 노예 제도에 대한 반감보다 버지니아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버지니아에 있었고, 버지니아는 남부의 대의에 충실했다. 리는 사실상 남군 총사령관으로 버지니아 전선을 진두지휘했다. 남부가 국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4년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리와 같은 탁월한 장군들의 역할이 컸다.

남부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서부 미시시피 전선에서였다. 그곳에는 리에게 필적할 만한 장군이 없었다. 오히려 북군에 그랜트(Grant)와 셔먼(Sherman) 같은 맹장들이 포진해 있었다. 1863년 봄, 그랜트는 미시시피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빅스버그(Vicksburg)로 향했다. 빅스버그를 잃으면 남부연합은 미시시피강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러면 남부는 두 동강이 난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의 지원을 잃게 되면 이미 열세인 전력은 더욱 약해질 게 뻔했다. 남부연합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리는 새로운 작전을 제안했다. 북침이었다. 그동안 남군은 고향에서 싸웠다. 전쟁 목표가 북부 정복이 아니라 북부로부터의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부는 전쟁 내내 평화를 누렸다. 리는 북부로 쳐들어가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위협함으로써 북부에 전쟁의 공포를 퍼트리고 반전(反戰)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다. 두려워진 북부의 민심이 링컨을 압박하면 남부는 협상을 통해 연방에서 독립할 수 있을 터였다. 남부 수뇌부는 리의 새로운 작전을 승인했다. 7만명이 넘는 대군이 리 장군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1863년 6월).

게티즈버그에서 싸우다

북군 역시 남군을 추격해 북으로 갔다. 둘은 펜실베이니아 남쪽의 작은 마을 게티즈버그에서 충돌했다(1863년 7월 1~3일). 사흘간 남과 북은 치열하게 싸웠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남군의 사기는 드높았지만, 북군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3일째 되는 날, 리는 세미터리 리지(Cemetery Ridge)에 주둔 중인 북군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돌격대를 이끌었던 장군의 이름을 따 ‘피킷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 불리는 진격은 그러나 북군의 집중포화에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남군은 게티즈버그에서 철수했다. 리의 패배였다. 남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링컨은 북군 사령관 미드(Meade) 장군에게 리의 군대를 추격하라 지시했다. 리를 잡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드높은 리의 명성 앞에서 북군의 장군들은 망설였다. 리의 군대는 무사히 버지니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은 계속될 터였다.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안에 마련된 링컨의 흉상. 역사에 남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이 묘지에서 행해졌음을 상징하고 있다. 링컨은 이 연설을 통해 남북전쟁이 민주주의 정부를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한 전쟁임을 명확히 했다./송동훈

링컨, 불멸의 명성을 부여하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막대한 사상자를 남겼다. 양측 합쳐서 5만명이 넘는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연방정부는 전투 현장에 묘지를 조성했다. 묘지 봉헌식은 1863년 11월 19일에 열렸다. 전날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링컨은 홀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다음 날 묘지는 청중 약 9000명으로 가득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지낸 유명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의 2시간에 걸친 열정적인 연설이 끝난 후 링컨은 연단에 올랐다. ‘80년 하고도 7년 전에’로 시작된 대통령의 연설은 짧았다. 연설이 끝났을 때, 이토록 짧은 연설을 예상치 못했던 청중은 침묵했다. 링컨이 몸을 돌려 자리로 향하자 마침내 박수 소리가 터졌다. 청중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게티즈버그 유적지의 국립묘지로 들어가면 입구 오른쪽에 링컨의 흉상이 놓여 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연설 현장을 기념하는 흉상이다. 묘지는 너무나 고즈넉해 그날의 혈투를 상상하기 어렵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무덤은 그 기념비를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낮게 배치돼 있다. 무명용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고향 전우들과 나란히 묻혀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링컨은 ‘세계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 대신 이곳에서 용사들이 한 일을 기억할 것’이라 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세계는 링컨이 한 말을 통해 군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링컨은 그들의 용기와 희생에 불멸의 명성을 불어넣었다. 그의 말이 고결하고, 마음이 진실했던 탓이다. 지금도 게티즈버그에 갔던 봄과 여름을 생각하면 상쾌하고 담백한 풀 향기가 난다. 수준 낮은 정치인들의 비루한 말이 사방에 넘쳐 불쾌할 때면 나는 게티즈버그의 국립묘지를 생각한다. 위대한 정치가와 그가 추구했던 참민주주의의 이상에 위로받기 때문이다. 내게 게티즈버그는 이동하는 안식처다./펜실베이니아 게티즈버그=송동훈

게티즈버그 국립묘지의 기념비는 남북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연방을 지킨 모든 군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비를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배치된 많은 무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무명용사들의 묘다. 그들은 오직 묘비에 적힌 숫자로만 기억되고 있다./게티이미지뱅크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게티즈버그 연설은 고전(古典)과 같다. 누구나 들어봤지만 정확한 내용을 아는 이는 드물다. 드높은 민주주의의 이상이 담겨 있기에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읽고 생각하기에 적기다.

“87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자유와 만인 평등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해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세워진 이 나라가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바로 그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 바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 땅의 일부를 봉헌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한다 해도 더 신성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이곳에서 싸운 용사들이 이미 이 땅을 신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 이상 보탤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을 전 세계가 주목하거나 오래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용사들이 한 일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숭고하게 이끌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한 과업을 위해 우리를 봉헌해야 합니다. 명예롭게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를 낳을 것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