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미국은 여전히 매일 수만 명씩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실리콘밸리에 살고 있는 필자도 지난 3월 중순부터 캘리포니아주의 ‘자택 격리(shelter in place)’ 명령으로 집에서 일하고 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사무실이 있는 아내도, 동부에 위치한 대학 졸업반 아들도 집에서 업무와 학업을 온라인으로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첨단 기술을 주도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의 기술 대중화는 한국보다 훨씬 느린 편이다. 오래된 인프라와 관행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쇼핑과 온라인 결제 원천 기술이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했지만 미국 전체 상거래 시장에서 전자 상거래가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한국⋅중국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보다 낮다. 모바일 결제 비율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생활을 해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미국은 아직도 개인 수표를 손으로 직접 쓰고, 주고받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다. 이런 ‘디지털 느림보’ 미국 사회가 코로나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선 ‘탈(脫)종이화’다. 지금도 미국인의 10% 이상은 세금 보고서를 종이로 제출하고, 미납 세금을 종이 수표로 세무 당국에 보낸다. 코로나로 재택근무하는 미 국세청 직원들이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곳곳에서 구체적인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에 대한 디지털 서명 설루션을 제공하는 도큐사인(DocuSign)이란 회사의 올해 매출이 40% 늘어난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간 종이 사용에 따른 빈번한 오류와 사고 가능성, 비효율에도 발걸음이 더뎠던 종이 문화 탈피가 코로나를 계기로 발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외식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단단히 버틴 곳들의 공통점은 모바일 주문 픽업(pickup), 배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식당 메뉴가 온라인화했음을 의미한다. 오프라인 식당 메뉴도 디지털화하고 있다. 코로나 초기에는 메뉴에 비닐을 씌워놓고 한 테이블이 사용할 때마다 일일이 소독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다 이제는 아예 QR 코드를 테이블에 붙여놓고 손님이 각자 스마트폰으로 메뉴를 보게 하는 곳이 늘고 있다.

미국에 여행 온 사람들이 난감해하는 경험 중 하나인 식사비 결제 과정도 바뀌고 있다. 원래는 테이블에서 영수증을 받은 다음 신용카드를 건네고, 다시 카드를 받아서 팁(봉사료)을 써넣고 영수증 두 장에 서명한 뒤 한 장은 놔두고 한 장은 가지고 가는 번거로운 절차다. 최근에는 이를 피하기 위해 영수증에 ‘결제용 QR 코드’를 인쇄해주는 곳이 많이 늘었다. 손님이 스마트폰으로 한 번에 결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일부 식당은 음식 값에 알아서 팁 20%를 포함하기도 한다.

사람들 간의 소통도 많이 바뀌었다. 원격 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저녁 식사 모임부터 동창회, 북클럽 토의, 포커 게임, 원격 진료까지 해봤다. 한 방향으로 중계하는 유튜브로는 콘서트와 장례식을 경험했다. 코로나 이전에 중요한 사람을 인터뷰할 때는 식사를 하고, 산책도 같이 하며 상호 조합을 살펴봤지만 지금은 오로지 줌으로만 판단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는 여러 사람이 집에 방문하지 못하는 만큼, 매물을 촬영해 유튜브에 올려놓고 매터포트(Matterport)라는 스타트업의 3D 사진을 이용한 가상 방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온라인 예약’도 활성화됐다. 참석 인원을 제한해 2m 거리 두기를 하기 위해서다. 수영장은 레인당 30분씩, 와이너리는 90분씩 시간을 제한해 손님을 받는다. 실리콘밸리의 한 고급 백화점은 사전 예약 손님만 입장시킬 뿐 아니라 손님이 입어본 옷은 이틀간 다시 매대에 놓지 않는 정책으로 손님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있다. 요즘 일부 데이트 앱은 남녀가 서로 코로나 테스트 ‘음성 결과’를 인증하지 않으면 짝을 지어주지 않는다는 기사까지 읽었다.

이런 변화는 언젠가 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코로나가 이를 10년 이상 앞당겼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가 빨리 확산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코로나에 맞서는 백신·치료제를 위한 생명과학 기술, 공기 중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공기 청정 기술, 확진자 동선을 추적하는 모바일 기술 연구 역시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도 이런 첨단 기술이 신속하게 해결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