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경기도 광명에서 열린 ‘제1회 디랙스 인도어 마라톤 대회’ 풍경. 총상금 5000만원을 두고 152인이 열띤 레이스 경쟁을 벌였다. 대형 스크린 3개에 참가자의 아바타가 연동된 가상 트랙과 실시간 기록이 펼쳐져 있다. /디랙스

미세먼지도 비바람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

실내 벽면 전체를 덮는 초대형 LED 모니터에 육상 트랙이 펼쳐졌다. 숲과 호수를 낀 가상 코스. 그 위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참가 선수들의 아바타가 등장했다. 이제 진짜 게임이 펼쳐질 차례. 모니터에 이윽고 신호등처럼 빨간불이 들어왔다. 노란불, 그리고 초록불. “출발!” 지난달 18일 광주역 인근 한 대형 헬스장에서 독특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백화점 건물에 입주한 1000평짜리 공간, 헬스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치러진 실내 마라톤 경주였다.

서울·목포·울산 등지에서 모인 러너 50명이 러닝머신 위를 달구자 한겨울이 금세 열기로 뒤덮였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참가자의 속도와 순위가 모니터에 표시됐다. 대회에 참가한 마성민(40)씨는 “마라톤 시작하고 8년 동안 밖에서만 뛰다가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으로 경주를 한다고 하니 어떨지 궁금했다”면서 “내 기록과 상대 기록을 그래프로 확인하면서 뛰니까 경쟁심도 자극되고 더 뛰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이날 남자 5㎞ 부문 1·2위는 단 0.5초 차이로 갈렸다.

1초 단위 승부… 짜릿한 레이스

마라톤은 매력적이지만 제약이 많은 스포츠다. 수십㎞에 이르는 코스, 교통 통제, 관리 인력도 상당수 필요하다. 특히 날씨는 골치 아픈 변수다. 봄에는 황사, 여름에는 무더위와 장마, 겨울에는 추위가 러너의 발목을 잡는다. 그리하여 상금 450만원을 걸고 ‘제1회 투탑스 실내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 투탑스 강희성 대표는 “실내 마라톤은 환경적 요소에 관계없이 365일 언제든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면서 “증가하는 국내 러닝 인구를 헬스장으로 유인하려는 전략적 차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내년 2월에도 실내 마라톤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42.195㎞ 풀코스보다는 5㎞, 10㎞, 21㎞ 등 단축 코스 승부가 주를 이룬다. 박진감을 위해서다. 풀코스 완주는 세계적 엘리트 선수여도 2시간을 넘기는 탓에 아무래도 분위기가 루즈해지기 쉽기 때문. 대신 변칙적인 ‘팀 플레이’ 등을 도입해 흥미를 고조시킨다. 승부는 더 치열해진다. 지난 9월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200평 규모 러닝센터 베가베리에서 열린 ‘제1회 베가베리 인도어 마라톤 대회’ 역시 5명이 한 팀이 돼 10㎞를 달리는 릴레이 마라톤 등을 종목에 포함했다. 20팀이 참전했는데, 5㎞ 결승전(3인)에서는 1초 차이로 1등이 바뀌는 명승부가 펼쳐졌다.

◇첨단 기술이 싹틔운 엔터테인먼트

지난달 광주광역시 헬스장에서 열린 실내 마라톤 대회 현장. /투탑스

첫 출발은 국내 운동기구 전문 회사 디랙스가 지난 4월 경기도 광명에서 상금 5000만원을 걸고 개최한 ‘제1회 인도어 마라톤 대회’였다. 독자 개발한 특수 러닝머신 기술을 홍보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러닝머신으로 마라톤을 하려면 실제 지표면을 달리는 것과 유사한 컨디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랙스 관계자는 “바닥의 특수 센서로 몸의 움직임을 감지해 속도를 자동 조절하는 기능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면서 “버튼을 조작하느라 집중력이 깨지는 일 없이 실제 마라토너처럼 자연스레 페이스 조절을 해가면서 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무릎이나 발바닥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기술도 뒷받침됐다.

외국에도 실내 마라톤 대회는 열린다. 먼 옛날 1909년 영국 런던의 공연장 로열 앨버트 홀에서도, 지난달 노르웨이 오슬로 비슬렛 스타디움 지하에서도. 대부분 널따란 실내 공간에 육상 트랙처럼 원형 코스를 마련하고 수백 바퀴를 뱅글뱅글 도는 방식이다. 여러 외신에서 장난스레 표현했듯 자칫 ‘형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흥’이 빠지면 곤란하다.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이유다. 디랙스 측은 핀란드 스포츠 게임 회사 CSE와 합작해 참가자의 실시간 기록을 전광판의 아바타와 연동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경기장 내에 DJ를 배치해 경쾌한 사운드를 계속 공급하고, 관중석에서는 스탠딩 공연처럼 응원할 수 있도록 했다. “아드레날린을 위해서.”

마라톤은 흔히 자기와의 싸움으로 번역되는 외로운 운동이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최상위 그룹을 제외하면 레이스 도중 다시 마주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실내 마라톤은 그렇지 않다. 바로 옆에서 끝까지 경쟁할 수밖에 없다. 이 대회에 참석한 특전사 출신 홍범석(37)씨는 “일반 마라톤 대회에서는 스타트 지점에서 ‘안녕하세요’ 인사 나누고 출발하면 5분 뒤부터는 안 보인다”면서 “실내 마라톤의 장점은 평소 좋아했던 선수들의 자세와 페이스 조절 방식을 끝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수직으로 달린다, 고층 건물 마라톤

수직 마라톤 대회 참가자가 롯데월드타워 계단을 오르고 있다. /롯데물산

길은 수평으로만 뻗는 것이 아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는 1251개 계단이 있다. 뛰어오르면 마라톤에 준하는 운동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수직 마라톤 대회 ‘시그니처 63 RUN’이 열린 이유다. 지난 6월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대회가 재개됐고, 1000여 명이 참가했다. 가끔 계단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10층마다 비치된 음료수로 보충하며 참가자들은 달렸다. 죽기살기로 달리긴 하나, 어디까지나 재밌자고 하는 운동. ‘오징어게임’이나 ‘수퍼 마리오’ 등의 이색 복장을 착용하고 달린 코스튬 플레이 부문이 축제 분위기를 이끌었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타이베이101, 하노이 랜드마크72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고층 빌딩에서 이 같은 수직 마라톤 대회가 열리곤 한다. 비좁은 지형지물, 도심의 한계를 러닝 공간으로 재편한 아이디어다.

잠실에는 123층, 계단 총 2917개 롯데월드타워가 있다. 이곳에서도 수직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스카이 런’이다. 지난 4월 대회를 위해 2000명을 모집했는데, 접수 시작 5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6세 아동부터 81세 노인까지 참가했고, 대회 참가비 전액은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 환자들의 재활 치료에 기부됐다. 우승은 매주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허벅지와 심폐 기능을 단련해 온 김창현(24)씨가 차지했다. 19분 46초. 뛰다가 걷다가 난간을 밧줄처럼 끌어당겨 가며 기어코 정상에 올랐다. 참가자 박유진(26)씨는 “60층 정도 왔을 때부터 고비가 왔지만 다 오르고 나니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계단마다 지친 참가자를 응원하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올라왔어요.” 올해도 완주가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