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여 주십사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 일본제국의 온갖 판도 내와 아세아의 문명 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우리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 함은 심히 통한할 일로, 이제 각하에게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삼천리’ 1937년 1월 호)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우가키 조선총독은 기자회견에서 “국가 비상시에 댄스를 허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6년 후, ‘대일본 레코드’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바 멕시코’ 여급 김은희 등은 만주사변도 수습되었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으니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그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댄스홀이 허가되기는커녕 카페, 바, 요릿집 등에서 성행하던 송년회나 크리스마스 축하연마저 금지되었다. 그해부터 유흥업소는 ‘국위 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군 전승 대연회’ 같은 이름을 내걸고 연말 축하연을 암암리에 이어갔다.

해방된 지 채 두 달이 되기도 전 자유신문에는 '범람하는 꼴불견'이라는 만화가 실렸다. /국사편찬위원회

8·15 이후 총독부의 압제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만끽한 분야가 유흥업계였다. 이서구 등이 그토록 갈구해 마지않았던 댄스홀도 해방의 감격 속에 문을 열었다. 해방된 지 채 두 달이 되기도 전 ‘자유신문’(1945.10.7)에는 ‘범람하는 꼴불견’이라는 만화가 실렸다. “일본이 못 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나 다 한번 해보고 싶은 까닭인지. 한 집 걸러 술집, 두 집 걸러 ‘딴스홀’. 재즈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 서울은 조선 서울이고, 외국 서울이 아닐 텐데…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다가는 다리가 찢어질걸!”

생산 설비의 상당수가 멈춰 섰고, 서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였지만, 서울의 환락가는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었다. 해방 당시 10여 곳에 불과하던 서울 시내 고급 요릿집은 불과 1년 만에 31곳으로 늘어났다. 그 밖에도 카바레 14곳, 바 59곳, 카페 12곳, 그릴 4곳 등이 성업 중이었다. 1946년 초,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은 유흥업소를 30%만 남기고, 70%를 폐업시키겠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허가받은 유흥업소는 술집 3225곳, 유곽 111곳, 댄스홀 4곳으로 격증했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기생이 631명, 창기가 682명, 그 밖에 여급과 작부가 2556명에 달했다. 미등록 유흥업소와 그 종사자는 그보다 몇 배는 많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미군이 유흥가의 ‘큰손’으로 떠오르자,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도 출현했다. “서울 거리를 더럽히는 국치랑(國恥娘·나라의 수치인 여성)들을 일소해 버리자는 소리. 연합군을 환영한다는 아름다운 핑계로 요사이 서울 거리의 풍기를 극도로 어지럽히던 유두분면(油頭粉面·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의 해괴한 여인들이 출몰하여 서울 시민들을 격분시키고 있다. 이들은 민족 해방을 풍기 해방, 정조 해방으로 착각하였음인가. 백주에 큰길로 외국인과 끼고 다니는가 하면 그들의 자동차에 올라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달리고 있어 풍기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문제로 화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권을 얻는 데 눈이 어두운 돈 있는 무리들이 이들을 이용하고 부채질하여 최근에는 더욱 심해 가고 있다. 소위 ‘바-’니 ‘카바레’니 하는 간판 단 집을 밀회 장소로 사용하게 하고, 그 값으로 이권을 얻으려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국욕(國辱) 여인 부대와 아울러 이들을 매장시켜 버리자는 소리가 높다.”(자유신문 1945.10.23.)

1945년 10월 23일 자유신문에 실린 만화 '국치랑들의 이꼴저꼴' /국사편찬위원회

‘국치랑’에 관한 기사는 해방 직후 신문 사회면의 단골 소재였다. 1946년 2월 3일 오후 7시, 종로경찰서 소속 경관은 통의정 거리에서 “갖은 교태를 다 부려가며 미군 자동차를 ‘스톱’시키고 있는 미모의 3인조 단발랑(斷髮娘)”을 검속했다. 창신정에 사는 스무 살 백정희 외 2인은 자칭 “이화여전을 졸업하였다”고 했으나, 인천에 있는 댄스홀에서 일하는 댄서들이었다. 그녀들은 “거리에 나서면 으레 질주하는 미군 자동차를 용건도 없이 정지시켜 타고 다니는 상습자”였다. 종로경찰서에서는 “미군 자동차를 보고 ‘헬로 스톱’하는 여성”을 단호히 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동아일보 1946.2.5.)

유흥업소가 늘어나면서 경찰의 풍기 단속 활동도 강화되었다. 1946년 3월 16일,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정보계원들은 댄스홀과 카바레 영업이 끝난 후 댄서들을 미행해 자택으로 손님과 함께 들어가는 남녀 아홉 쌍을 검거했다. 그중 지식계급이 반수 이상이었다. 같은 해 7월 7일 하루 동안 서울에서만 풍기 문란 사건이 46건 발생했고, 93명이 검거되었다. 대중식당으로 영업허가를 받아 밴드를 고용해 사교댄스 영업을 하던 업소들, ‘댄스 선생’에게 댄스를 배우던 ‘유한마담’과 ‘불량 청년’들이 수시로 적발되었다. 1946년 연말에는 일제강점기 우국지사들의 연락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던 유서 깊은 요릿집 ‘명월관’에서 ‘퇴폐 영화’를 상영하다가 기생과 신사·숙녀 수십 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엄숙한 건국 도상에서 썩은 돈을 뿌려 향락하다 못해 ‘도색(桃色)영화’를 즐김으로써 풍기를 문란케 하는 악질 신사숙녀의 요리점이 수도청 보안과에 드러났다. 서울시 돈의동 명월관에서는 지난달 20일 밤 8시경, 약 15분 동안에 걸쳐 음탕한 도색영화를 상연한 사실이 있었다. 이 도색 필름은 상인 김린이 가지고 와서 주흥에 겨운 나머지 기생 최선 외 4명, 그 외의 파렴치한 신사숙녀 20여 명과 더불어 음란을 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발각된 일에 지나지 않고 일류요리점 몇 군데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이러한 사실이 빈번하던 모양이다. 겨레가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이 비상시에 이렇듯 부패한 향락에 젖음이 웬 말인고. 방금 경찰 당국에서는 문제의 도색 필름을 엄탐(嚴探)하는 동시에 파렴치한 분자와 악질 요리점을 샅샅이 수사하여 엄벌에 처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조선일보 1946.12.6.)

미군정 기간, 한국인들은 분단 극복 방식과 새로 수립될 정부의 성격을 두고 좌우로 갈라져 사생결단의 정치 투쟁을 벌였다. 같은 기간 대도시 유흥가에서는 매일 밤 음주, 가무, 성(性)이 어우러진 환락의 축제가 벌어졌다. 기성세대와 지식인들은 엄중한 시기 “우리는 애욕의 향락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치 과잉의 시대에 폭발한 기이한 퇴폐풍조를 비판했다. 하지만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유흥가의 향락객들은 대체로 기성세대와 지식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