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서울 한 소아청소년과 의원에 폐업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의사들에게 진상 환자를 거부할 권리를 줘야 합니다. 이대로면 소아과는 더 줄어들 겁니다.”

최근 광주광역시 한 소아과가 악성·허위 민원을 제기한 환자의 보호자로 인해 폐과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더는 못 참겠다. 현행법상 불법인 의사의 진상 환자 진료 거부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부산에서 소아청소년과를 운영하는 전문의는 “진상 부모를 상대하는 고통은 당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며 “가격 결정권도 없고 환자를 거부할 권한도 없는 의사들을 ‘돈만 밝히는 특권층’으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부 의사는 왜 격하게 ‘진료 거부’를 요구하는 것일까.

◇'진상 손님’ 내쫓지 못하는 병원들

폐과 선언으로 화제가 된 소아과 원장은 지난 6일 “꽃같은 아이들과 함께 소아청소년과 의사로 살아온 지난 20여 년, 제겐 행운이자 기쁨이었다”면서 한 어린이 환자의 보호자 A씨가 악성·허위 민원을 제기해 다음 달 5일부터 폐과한다고 알렸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에 따르면, 지난 5월 A씨의 딸(4)이 피부가 붓고 고름이 나오는 증상으로 해당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드레싱을 했다. 그런데 A씨는 비급여로 청구된 드레싱 비용 2000원 등을 간호사가 설명하지 않았다며 문제 삼았다고 한다. 이후 포털 사이트에 나쁜 후기를 적고 보건소 등에 민원을 제기한 것.

의사회 측은 “진료 당시 의사가 비급여 부분을 설명했고, A씨의 항의로 환불 조치했다”고 했다. 하지만 관할 보건소가 비급여 사안을 제대로 고지했는지 확인차 그 병원에 방문했고, 이후 병원 측은 “환자가 아닌 이런 보호자를 위한 의료행위는 더 이상 하기 힘들다”며 향후 만성 통증과 내과 관련 질환을 다루는 의사로 전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A씨 측은 언론을 통해 “허위 악성 민원이 아니다. 진료 후 아이 상태가 악화됐고 병원에 요구해 받은 세부 진료내역서에 중복 진료나 동의하지 않은 비급여 부분에 대한 진료비가 청구돼 있어 사실 확인을 위해 민원을 제기한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소아과 폐과 원인을 일부 진상 부모와 맘카페 탓으로 모는 건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어느 가게나 진상 손님이 있기 마련인데, 특정한 환자 보호자를 사회적으로 비난받게 하며 폐과 원인으로 돌리는 건 과도하다는 것.

하지만 몇몇 소아과 의사는 “일반 사업장과 병원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경남에서 소아청소년과 의원을 운영하는 전문의 B씨는 “일반 사업장은 가격을 자유롭게 책정할 권리가 있고, 진상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냐”며 “병원은 공익성을 가지고 있어 더 많은 규제를 받는다. 의료 가격은 국가에서 정하고,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면 처벌받는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5월 경북 포항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24개월 미만 영아의 귀지를 제거해달라는 부모에게 이비인후과 진료를 권유했다가 진료 거부 혐의로 보건소 조사를 받기도 했다. 진료 중 움직여 다칠 위험이 있고, 혹시 다쳐서 피가 나면 상태가 위험해질 수 있어 이비인후과 진료를 권했는데, 부모가 진료 거부로 몰아 문제 삼은 것. 해당 전문의는 의사회 익명 게시판에 “아기가 어리고 협조가 어려워 ENT(이비인후과) 진료를 권유했는데 부모들이 ‘다른 방 원장한테라도 받겠다’며 끝까지 진료를 고집했다”며 “열이 많이 나고 중이염일 수도 있으니 이비인후과에서 귀지를 빼고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썼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거나 진료하지 않는 경우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환자가 의사의 치료 방침을 거부하거나 의사에게 모욕, 명예훼손 등을 하는 경우 ‘정당한 사유’로 인정해 진료 거부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정당한 진료 거부’로 인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게 의사들 말이다. 서울에서 소아청소년과 의원을 운영하는 전문의 C씨는 “병원에 대한 민원 조사와 평가가 환자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의사들 입장에선 억울할 때가 많다”며 “의사 판단과 상관 없이 부모가 항생제를 처방하라느니, 기관지 확장제를 더 처방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난동을 부리거나 맘카페에 악성 글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병원 공격하는 별점 후기도 없애야”

일부 의사가 진료 거부권에 더 열을 올리는 건 최근 소아응급 문제 등이 불거지자 보건 당국이 ‘진료 거부 처벌’을 앞세워 의료기관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보건복지부는 각 시·도에 ‘응급의료기관 24시간 진료체계 운영 철저 안내’라는 제목의 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부재 등을 이유로 24시간 응급환자 진료 의무를 위반할 경우 시정명령, 재정지원 중단, 수가(진료비) 차감 등의 대상이 된다고 공지했다. 복지부는 “응급실에서 소아 환자를 제한적으로 수용하지 말라고 응급의료기관에 요청한 취지”라고 했지만, 의사들은 “소아 응급환자를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상황인데 진료 거부로 이렇게 겁박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소아과 의사는 “네이버 등에 있는 별점 후기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의 B씨는 “별점 후기가 사실상 맘카페의 공격 수단이 되고 있는데 일반 상점과 달리 의사들은 이런 고객들에게 대항할 최소한의 수단(진료 거부)도 없지 않은가”라며 “의사들을 기득권 집단으로 몰아만 갈 게 아니라, 보호해 줄 부분은 충분히 보호해야 필수 의료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의사에게 진료 거부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건 국민 정서상 더 큰 반감을 일으킬 것”이라며 “그럼에도 의사들이 진료 거부까지 운운하며 분노하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 환자들과 의사들이 각자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균형 있는 중재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