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 부모한테 버림받았지? 네 엄마가 창녀라서야!” 마귀 들린 여자가 악을 쓰며 퍼붓는다. 청년 사제 차은우(요한 역)는 저주가 들리는지 마는지 본 체도 않고 구마(驅魔) 의식을 준비한다. 초를 켜고 성경을 펴는 그의 귀에 들리는 건 오직 힙합 비트.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아일랜드’의 한 장면이다.

#2. 여의도 직장인 김모(28)씨는 출근길마다 영화 ‘라붐(1980)’의 소피 마르소가 된다. 헤드폰을 쓰고 출근하던 어느 날, 눈앞에는 회색 빌딩숲 사이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귓가에는 주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지오디(god)의 노래 ‘보통날’이 흘러나왔다. 김씨는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주인공 우영우(박은빈)는 출근길에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어 왁자지껄한 소음에 예민하지만, 헤드폰 덕에 만원 지하철 속에서도 평화로운 모습이다. /ENA

MZ세대로 불리는 20~30대가 요즘 ‘노이즈 캔슬링(잡음 제거)’ 헤드폰에 푹 빠졌다. 노이즈 캔슬링은 전자적인 원리로 특정한 소리를 제거해주는 기술이다. 헤드폰(이어폰) 안에 있는 작은 마이크가 바깥의 소음을 감지한 뒤에 그와 비슷한 주파수의 소리를 반대 방향으로 보내면 두 소리가 중첩되면서 사그라드는 원리. 음량을 높이지 않아도 음악을 선명하게 듣고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군중 속 고독’에 매료된 MZ

국내 노이즈 캔슬링 유행의 중심에는 단연 MZ가 있다. 소니코리아에 따르면 노이즈 캔슬링 제품 구매자 가운데 20~30대 비율(정품 등록자 기준)은 2019년 46%에서 2021년 82%로 훌쩍 뛰었다. MZ들 덕에 작년 헤드폰 판매량도 1년 만에 145%나 늘었다고 했다.

노이즈 캔슬링 인기는 음악 감상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MZ세대는 잡음과 함께 바깥의 모든 간섭이 사라지는 경험에 열광한다. 강유민(31)씨는 “주어진 환경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는 느낌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던 5년여 전 비행기에서 조용히 음악을 들으려고 장만한 헤드폰이 이제는 매일 끼고 다니는 필수품이 됐다. 그는 “내가 원치 않는 소음은 다 차단하고 원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창 일 스트레스가 많고 사람들이랑 부딪혀야 할 때일수록 노이즈 캔슬링을 찾게 된다”고 했다.

청각은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수동적인 감각이다. 보기 싫은 건 눈 감으면 그만이고 악취도 잠시나마 숨을 참을 수 있지만 소리는 아니다. 많은 사람이 층간 소음에 속수무책인 이유다. 서울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김모(33)씨는 층간 소음 때문에 올해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샀다가 평화를 찾았다. 그는 “스펀지 귀마개는 쿵쿵 울리는 소음을 다 막아주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소리가 잘 안 들리니 잘 때밖에 못 꼈다”며 “이제는 OTT로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집안일을 하면서도 층간 소음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요컨대 노이즈 캔슬링은 들리는 대로 듣기를 거부하고 ‘내가 선택한 소리에만 귀를 내어주겠다’는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송재룡 경희대 특임교수(사회학)는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주도적으로 일상을 만들어가려는 젊은 세대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어디서든 혼자만의 시공간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이 간섭받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MZ에 통했다는 것이다.

◇군용 헤드폰에서 Y2K 아이템으로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헤드폰이나 이어폰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조종사 청력을 보호할 수 있는 군(軍)용 헤드셋으로 개발됐고 비행기 퍼스트클래스 승객들에게 제공되는 이어폰 등 항공기에서 주로 쓰였다. 이후 음악 애호가들이 찾는 고가 음향 기기에 쓰였다.

2019년 애플, 2020년 삼성이 이 기능을 넣은 무선이어폰 모델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최근에는 일상에도 자리 잡았다. 국내 업계 관계자는 “음악 듣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기능적인 장점에 Y2K 스타일(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유행)이 다시 인기를 끌면서 헤드폰이 패션 아이템으로 떠오른 영향도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업인 얼라이드마켓리서치의 작년 보고서에 따르면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어폰의 세계 시장 규모는 지난 2021년 131억달러(약 17조2000억원)에서 앞으로 연간 13.2%씩 커져 2031년에는 454억달러(약 59조7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보고서는 세계적으로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고품질 오디오 장비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부작용은 없을까. A씨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영상을 보면서 지하철에 타다 스크린도어와 열차 사이에 발이 빠져 허벅지를 다쳤다. ‘발 빠짐에 주의하세요’란 방송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듣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서울교통공사가 밝힌 실제 사고 사례다. 2020년부터 작년 9월까지 서울 지하철에서 일어난 발 빠짐 사고 136건 중 절반이 넘는 78건이 20~30대였다. 어린이나 어르신들 사고가 많았으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10대 미만(1건)이나 70대 이상(15건)에선 오히려 적었다. 이 때문에 최근 업체들은 노이즈 캔슬링 수준을 단계별로 조절하거나 ‘출퇴근’ ‘운동’ ‘휴식’ 모드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