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을 왜 누르셨어요?”

“출입구에서 당근 거래만 잠깐하고 올 건데 문 좀 잠시 열어주시면 안 되나요?”

일러스트=한상엽

이달 초 서울 지하철 2호선의 한 환승역에서 근무하는 서울교통공사 소속 역무원 A씨는 비상문으로 향했다. 비상문 호출벨을 누른 사람은 장애인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승객도 아닌 이른바 ‘당근족’. A씨는 “처음 이런 무임승차 요구를 받았을 때는 다들 너무 당당하게 ‘당근거래만 하고 올 테니 열라’ 하시니까, 순간 당황해서 ‘이게 열어주는 게 맞나’ 고민할 정도였다”며 웃었다. “전에는 헛웃음이 나왔는데, 이제는 이런 일이 너무 잦아져서 웃을 수 없게 됐다.”

하루 평균 700만명이 이용하는 서울 시민의 발 지하철이 최근 늘어난 ‘신종 빌런(악당)’에 신음하고 있다. 역무원들은 “과거에는 주취자들의 소란과 난동이 잦았는데, 최근에는 이런 주취 소란뿐만 아니라 얼토당토않은 민원을 제기하는 승객들이 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웃고 넘기기 어려워진 신종 빌런들

역무원들은 “과거에는 몰래 무임승차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당당히 무임승차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어 당혹스럽다”고 했다. 역무원 B씨는 “당근거래뿐 아니라 역 입구 근처에 마트나 시장이 있을 경우 ‘금방 가서 장만 보고 올 테니 비상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승객들이 적지 않다”며 “호출벨이 울려 비상문에 가보니 대뜸 살인 전과가 적힌 ‘출소증’을 내밀면서 ‘문을 열라’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고 했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비상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한 뒤 역무원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몰래 무임승차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B씨는 “무임승차가 적발되면 요금의 31배를 부과하게 되어 있는데, 그럼 역무원에게 욕을 하고 멱살을 잡으며 폭행하거나 심하면 갑자기 흉기를 꺼내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화장실이나 승강장에 설치된 비상벨을 이유 없이 누르는 경우도 일상이다. 역무원 C씨는 “화장실 비상벨을 누르고 ‘몸이 불편하니 내려와서 뒤를 닦아달라’고 하시거나, ‘바지를 올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며 “술 취한 승객들이 비상벨을 마구 누르는 탓에 이제는 비상벨이 ‘양치기 소년’처럼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역무원 D씨는 “이러다 정말 비상 상황에서 벨을 눌러도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까 봐 스스로 경계심을 다잡지만, 막상 벨이 울려 달려갔는데 ‘누르면 정말 오는지 확인해봤다’는 승객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거짓 민원’도 난무한다. 무인 발매기에서는 표를 끊은 뒤 역무원을 불러 “잔돈이 나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승객이 적지 않다. A씨는 “이런 경우 저희가 ‘역무실로 가서 CCTV를 한번 확인해보자’고 말하면 대부분은 ‘일이 급해서 지금 가봐야 하니 이따 잔돈을 찾으러 오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데, 다시 잔돈을 받으러 오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며 웃었다. C씨는 “술에 취해 다친 분들이 역에서 난동을 부린 뒤 ‘역무원 때문에 다쳤다’는 식으로 거짓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역 내나 승강장 구석에 다짜고짜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승객도 있다. 역무원 D씨는 “CCTV를 보고 놀라 달려가면 ‘배가 아파서 어쩔 수 없다’고 하니 말문이 막히더라”고 말했다. 역무실에 찾아와 “분실물을 찾아내라”며 고성을 지르기도 한다. B씨는 “분실물센터를 안내하거나 ‘어디서 물건을 잃어버린 거 같냐’고 물으면 ‘그걸 알았으면 내가 직접 찾으러 갔지 당신들한테 왔겠냐’며 화를 버럭 낸다”며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다짜고짜 역무실로 들어와 눌러 앉으시는 경우도 적지 않는데, 이 정도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에 따르면 이런 ‘진상 민원’은 이용객이 많거나 환승역을 기준으로 하루 평균 300~500건씩 벌어진다. 역무원들은 “소위 ‘진상 승객’들은 전체 승객에서 보면 극소수고, 지하철을 워낙 많은 분들이 이용하니 민원이나 실랑이가 적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면서도 “그럼에도 역무원들이 직업적 회의를 느낄 정도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일이 잦다”고 호소했다. 송시영 서울교통공사 올바른노조 위원장은 “역무원은 사법권이 없다 보니 폭행 시비에 휘말려도 승객에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고, 진상 민원을 처리하면 불친절로 민원을 넣는 보복성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며 “스트레스로 심리 상담을 받는 역무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D씨는 “불필요한 소란을 벌이는 분들일수록 ‘너희 다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사는 것 아니냐’고 한다”며 “우리도 세금을 내는 시민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회의감을 떨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소란을 피우는 일부 승객들도 저희 입장에서는 고객이다 보니 무조건 단호하게 대처하기 어려워 곤혹스럽다”고 했다.

올바른 노조 측은 “역 내 질서를 유지하고 일반 승객과 역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승객이 많은 주요 역을 중심으로 지하철경찰이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성범죄 등 중범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송 위원장은“승객과 역무원 간 폭행이나 시비가 붙어도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이 너무 잦다 보니 매번 경찰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