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유니콘'에서 모니카가 직원들에게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피보팅(pivoting)으로 우리 버짓(budget)을 좀 더 타이트(tight)하게 운용해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 일부 영단어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자막이 달렸다. /쿠팡플레이

“우리 직원들 모두 캐파(capacity)가 되니까 애자일(agile)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제너럴(general)한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뎁스(depth) 있게 디벨롭(develop)시켜 보자고. 와이 낫(why not)?”

쿠팡플레이 시트콤 ‘유니콘’은 K스타트업의 현실을 담아낸 블랙코미디다. 유니콘의 배경인 스타트업 회사 ‘맥콤’의 인사팀장 모니카는 툭하면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인물. ‘깊이 있게 발전시켜 보자’고 하면 될 말을 ‘뎁스 있게 디벨롭시켜 보자’고 하는 식이다. 한국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도 “내가 과연 무엇을 메이드(made)하기 위해 잘 다니던 대기업을 리자인(resign)하고 이곳에 왔을까?” “우리 버짓(budget)을 좀 더 타이트(tight)하게 운용해야 할 것 같아” 식으로 영 단어를 쓴다.

모니카처럼 과도하게 외국어를 섞어 쓰는 말투와 문체를 일컫는 말이 있으니, 일명 ‘보그체’다. 과거 패션지 등에서 영어·불어 등 외국어를 남발한 데서 비롯된 조어다. 그런데 요즘에는 패션 업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보그체를 구사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해치는 언어 사대주의의 단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한편, 일각에서는 세계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전문용어 등은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게 뜻을 더 명확히 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사 빼고는 다 영어로? 넘쳐나는 국영 혼용체

판교·강남·성수 등에서 주로 쓰는 말, ‘판교 사투리’라는 게 있다. 스타트업이나 IT 기업 종사자들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은어를 의미한다. 대명사와 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보그체와 비슷하다.

판교 IT 기업에 근무 중인 김모(35)씨는 “이슈(issue), 리소스(resource), 팔로업(follow-up), 어젠다(agenda), 트라이(try),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등은 일상어처럼 쓰는 말인데, 개인적으론 조금 과하다고 본다”며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이 없는 용어라면 모르겠는데, 토종 한국인끼리 일반적 단어까지 영어로 말하는 건 민망하다”고 했다. 반면 스타트업 직원 조모(31)씨는 “(판교 사투리가) 너무 익숙하고, 구성원들이 다 이해하는 말이기 때문에 굳이 한국어만 고집해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김모(34)씨는 수시로 영어를 섞어 쓰는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했다. 김씨는 “스타트업도, IT 기업도 아닌데 대체 왜 영어를 섞어 쓰는지 모르겠다”며 “보고서를 올렸더니 (상사가) ‘키 아규먼트(key argument)를 프루브(prove)하기 위한 디테일(detail)과 에비던스(evidence)가 부족하다’고 하더라. 해외 경험도 없는 분이 이렇게 말하니 실소가 나왔다”고 말했다. 주부 이수연(54)씨는 최근 백화점에 갔다가, 한 매장 직원이 ‘이 모델(model)은 바잉(buying)하시는 클라이언트(client)분들이 많다’고 해 불쾌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냥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 될 걸, 왜 영어를 섞어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미형(상명대 교수) 국어문화원연합회장은 “IT, 패션 등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사적 소통을 할 때 외국어 단어를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충분히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도 영어를 남발하는 것은 현학적 처세를 위한 것으로 보여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권도 접수한 보그체? “소통 방해… 자제해야”

공직 사회와 정치권에서도 국영 혼용체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government engagement)가 바로 레귤레이션(regulation)입니다. 마켓(market)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중략)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aggressive)하게 뛰어봅시다.” 이는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마무리 발언. 일각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국민을 상대로 영어 테스트를 하는 것인가” 등의 비판이 나왔다.

27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기업벤처부의 합동 신년 업무 보고에서는 윤 대통령이 ‘센티멘털(sentimental·투자 심리)’이란 용어를 썼다. 그러나 이는 기초 경제 여건이란 뜻을 지닌 ‘펀더멘털(fundamental)’과 대비해 말하고자 한 바를 강조하느라 쓴 것이므로 적절한 표현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센티멘털이라고 말씀하신 뒤 투자 심리, 분위기 등 한국어 설명도 덧붙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공식 석상에서 영어 쓰기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한 수 위다. 지난달 15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열린 출입 기자단 간담회에서 한 총리는 “시리어스(serious)한 논의도 별로 못 했어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커넥티드니스(connectedness) 이런 것과 연계돼서…” “지금까지 어프로치(approach)가 저는 좀 마일드(mild)한 것 같아요” 등 영 단어가 섞인 말을 쏟아냈다. 미 하버드대에서 석·박사를 하고, 이명박 정부 때 주미 대사를 지낸 한 총리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과거엔 정치인이 영어를 섞어 말함으로써 유식한 이미지를 얻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對)국민 소통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조롱 대상이 된 지 오래”라며 “고위 공직자가 공개 석상에서 영어를 남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형 회장은 “공직자, 정치인들의 외국어 남용을 보면 우리말 대접이 이 수준밖에 안 되나 싶어 안타깝다”면서 “우리말을 쉽게 써야 국민들이 잘 이해하고 훨씬 더 효과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