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이태원 참사로 숨진 희생자 유가족 34명의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뉴스1

“과거 대형 참사 땐 희생자 이름과 나이, 성별 등 명단을 공개했다.”

친야(親野) 인터넷 매체 ‘민들레’가 유족 동의 없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5명을 공개하면서 이런 근거를 들었다. 과거에도 공개했으니 문제가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얼굴 사진은 물론 나이를 비롯한 다른 인적 사항에 관한 정보 없이 이름만 기재해 희생자들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는다”면서 “유가족 협의체가 구성되지 않아 이름만 공개하는 것이라도 유족들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깊이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하지만 명단 공개 직후 인터넷과 정치권에서는 “유가족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패륜 행위” “유가족 동의 없는 명단 공개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실제로 서해훼리호 침몰(1993년),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대구 지하철 참사(2003년), 세월호 침몰(2014년) 등 과거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 여러 언론이 희생자 명단을 세세히 보도했다.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은 “지금은 그때랑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주말>이 구체적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 신원 확인이 빨랐다

과거 대형 참사 때 언론의 희생자 명단 보도는 가족들에게 사망이나 구조 여부 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김성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16일 이태원 사고 관련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브리핑에서 “과거와 이태원 사고에 차이가 있다”면서 “과거에는 신원 확인이 오래 걸려 실종자 명단을 먼저 작성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 때는 희생자 신원 확인이 단기간에 끝나면서 실종자 명단이 오랫동안 관리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신상 공개가 사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재난 발생 현장에서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현장과 피해 가족의 혼선을 막기 위함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때는 이송된 사망자·부상자 명단이 병원별로 방송을 통해 실시간 보도됐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또한 사고 직후 언론을 통해 희생자 명단이 보도됐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 시신이 안치된 의료 기관에 대한 정보가 세세하게 공개됐다. 방기성 경운대 안전방재공학과 교수는 “과거 침몰·붕괴·화재 참사는 희생자 신원 파악에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 수십 일이 걸렸고, 이에 따라 실종자 가족들이 희생자 신원 공개를 먼저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반면 이태원 참사는 외국인 희생자까지 이틀 만에 모두 신원이 확인돼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② 개인 정보에 대한 인식 변화

전문가들은 “과거에는 개인 정보뿐 아니라 희생자와 유가족의 권리라는 개념조차 희박했지만, 무수한 사회적 재난과 참사를 겪으며 인식 수준도 높아졌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기자협회에서 제정한 ‘재난 보도 준칙’에서도 “피해자와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세한 신상 공개는 인격권이나 초상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히 해야 한다(제19조)”고 명시하고 있다. 이후 발생한 헝가리 유람선 침몰(2019년), 이천 물류센터 화재(2020년) 당시 희생자 명단을 보도한 곳은 거의 없었다.

민노총 산하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은 이번 명단 공개에 대해 “심각한 보도 윤리 불감증의 결과”라며 “재난 보도 준칙 제11조, 제18조, 제19조를 모두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재난 보도 준칙 제11조는 피해 규모나 피해자 명단, 사고 원인과 수사 상황 등 중요한 정보에 관한 보도는 책임 있는 재난 관리 당국이나 관련 기관의 공식 발표에 따르되 공식 발표의 진위와 정확성에 대해서도 최대한 검증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제18조는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 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③ 2차 가해 우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탓하는 잘못된 글이 여전히 온라인 커뮤니티 및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상황에서 2차 가해의 위험도 크다”며 “유가족 동의 없는 명단 공개는 트라우마를 겪는 유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권리 침해를 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지난 1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비경제 부처 부별 심사에서 명단 공개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피해자 가족들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은 채 명단이 공개됐다는 점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에서 유가족들의 요구를 수렴하는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2일 민변 주최로 열린 희생자 유가족 34명의 기자회견에서도 정부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공식적인 유가족 모임 지원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태원 참사로 딸을 잃은 이종관씨는 “유족들 모임을 차단한 정부 대처는 비인도적”이라며 “희생자 명단 공개 문제로 갑론을박하게 만든 것도 유족들이 만날 공간 자체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는 24일 서면 답변서에서 “비공식적으로 일부 유족과 의견 교환을 위해 접촉했으나, 지금 당장은 추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유족 모임 구성이 성사되지 못했다”며 “유족의 의사를 들어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계획을 마련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또 “유족의 의사가 최우선이고, 유족들이 원하는 경우 명단을 공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며 “명단 공개를 반대하는 유가족의 경우엔 어렵겠지만, 원하는 유족은 공개가 가능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