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베를린을 처음 방문한 것은 베를린이 동서로 분할되었던 1978년 겨울이었습니다. 그 겨울 장벽 부근에 설치된 관찰용 망루에 올라 장벽 너머 음울한 동베를린 지역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분단의 안타까움과 작은 공포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4년이 지났습니다. 6개월 동안 거주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베를린과 관련된 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으니 베를린은 외국 도시치고는 인연과 정이 깊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베를린에서 길을 걸을 때면 고개를 숙여 길바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찾는 것이 있습니다. 나만의 ‘보물찾기’입니다. 이달 초 베를린 방문 때에도 어김없이 보물찾기에 성공하였습니다. 보물은 다름 아닌 보도(步道)에 박혀 있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 이름 붙여진 손바닥 크기의 동판(銅版)입니다. 호텔 근처에 있는 한 극장 정문 앞에서 3개를 발견하였습니다. 함께 갔던 일행에게도 그것들을 소개하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일러스트=김영석

슈톨퍼슈타인은 군터 뎀니히(Gunter Demnig, 1947년 베를린 출생)라는 공예 예술가가 나치 정권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성 작업의 하나로 만들어, 1996년부터 지금까지 수만 개를 독일의 각 도시는 물론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여러 나라에도 설치하였습니다. 그 동판에는 희생된 유대인의 이름, 출생일, 체포일, 강제수용소, 사망일 등을 새겨 그들이 마지막 살았던 집이나 직장 앞 보도에 설치한 것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유대인 희생자가 무덤도 없고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형식에 그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과 유족을 추모·위로하고, 또 젊은 세대들이 나치 만행을 잊지 않도록 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잊히면 그 사람도 잊히고 만다는 탈무드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동판을 설치할 때면 근처에 사는 어린 학생들을 참가시켜 이 일의 취지를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작업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동료 예술가들이 동참하고 후원자가 늘어남에 따라 원래 홀로코스트 유대인 희생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한 프로젝트는 차츰 나치 정권에 의해 반(反)사회성 분자로 분류되어 희생되었던 집시, 정신병자 등과 체제에 저항한 레지스탕스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슈톨퍼슈타인’이라는 낱말은 사전상으로는 `장애물` `문제점` 정도의 의미인지라, 걸리적거린다는 뜻의 `걸림돌`이라 번역해도 무방할 낱말입니다. 그렇지만 설치 작업의 취지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돌이라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걸림돌도 될 수 있고 디딤돌도 될 수 있는 것처럼, 길거리에서는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나 걸림돌로 보이지만, 불행한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을 담은 것이니 오히려 ‘디딤돌’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겠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2013년 베를린에 살 때 어느 신문에서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부터 길을 걸을 때면 보도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큰길이나 작은 길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슈톨퍼슈타인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발견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그 사연을 읽어 보았습니다. 서너 살에 끌려가 한두 해 뒤 어린 나이에 사망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숙연해지곤 했습니다. 끌려간 사람 수대로 서너 개의 동판이 설치돼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훔볼트 대학교 정문 앞에는 교수, 학생 등 20여 명이 끌려갔는지 20여 개의 슈톨퍼슈타인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로도 독일을 방문하면 저의 슈톨퍼수타인을 찾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스스로 반성·사죄하고자 하는 슈톨퍼슈타인과 반성을 촉구하는 위안부 소녀상, 비슷한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에 너무 차이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