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26일)은 안중근 의사께서 113년 전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을 주도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를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날이 오면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년 전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 국제 학술 대회에 참석한 일본인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彥)씨입니다. 도쿄대학을 졸업한 직업 외교관으로서 네덜란드 대사를 지낸 뒤 교토 산업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한 분입니다. 학술 대회 때 제 옆에 앉아있던 그분은 저에게 조용히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일러스트=김영석

그의 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 개전 및 종전 당시 두 번에 걸쳐 일본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입니다. 시게노리는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 규슈 사쓰마번(薩摩藩·지금 가고시마현)으로 붙잡혀 간 도공의 자손으로 한국인의 혈통을 이어온 분(한국명 朴茂德)입니다. 시게노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도공의 일을 접고 도쿄대학에 유학한 뒤 외교관이 되어 독일·소련대사를 지냈으며 독일에 근무할 때 유대계 독일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한 분을 두었습니다. 시게노리는 평화주의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개전을 막고 종전을 서두르고자 노력하였으나 군국주의자들의 뜻을 꺾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합니다. 종전 후 도쿄 전범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0년 사망하였습니다. 시게노리의 외동딸은 일본인 외교관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도고 가즈히코(1945년생)입니다. 가즈히코 교수는 한국, 일본 그리고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분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저는 조금 놀라 호기심을 갖고 그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여느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가즈히코 교수가 외무성에 근무할 때 전문 분야는 주로 러시아 관계였습니다. 퇴임 후 2004년 러일전쟁 개전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렸는데 그때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손문(孫文)이 인용했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서론 부분을 통해서였습니다.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이래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큰 북소리로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공적이다. 그때 한·청 양국은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하였도다.”

안중근 의사가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를 이토록 찬양하였는데 불과 4년 후 어찌하여 이토를 사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가 관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놀란 것은 안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사상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이 침략의 야욕을 버리고 한·중·일 삼국이 서로 화합하고 동맹하여 서양 세력(특히 러시아)을 물리치고 평화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구주 및 세계 각국과도 평화를 이루자고 주창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가즈히코 교수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 나서고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등 안중근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옛날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들이 모여 살았던 가고시마현 미야마(美山) 마을에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있다면서 한번 방문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그 유명한 심수관요(沈壽官窯)도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공으로 끌려가 400년 이상 고향을 그리며 살았던 우리 동포들의 마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 고요한 마을에서 역사와 인간사의 기묘함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즈히코가 전해 준 어머니 도고 이세의 유언이 가장 가슴에 남습니다. “외교관으로서 명심할 것은, 정부에 진언(進言)할 것을 판단할 때 자국에 49, 상대국에 51을 놓을 것”.

한국 피가 섞인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