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아마추어 정치인을 보는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지난 23일 취임 44일 만에 사임을 발표한 리즈 트러스(47) 총리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총리를 아마추어에 빗대며 깎아내린 이유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이을 여성 지도자로 기대를 모았던 트러스가 취임 이후 실정만 거듭하다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 최고 정치 엘리트 코스로 불리는 옥스퍼드대 PPE(정치·경제·철학 전공)를 졸업하고 35세에 하원 입성, 외무·법무·교육·환경·국제통상 등 5개 부처 장관직을 거쳐 지난 9월 영국 최초 40대 여성 총리가 됐다. 하지만 실전에서 이런 이력은 무용지물이었다. 트러스는 치솟는 인플레이션 속에서 부자 감세와 에너지 보조금 지급 정책 등 현실에 역행하는 정책을 밀어붙였고, 격렬한 반대 여론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초고속 사임을 하는 바람에 총리로서 그의 유일한 업적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을 치른 일이 됐다. 그럼에도 다른 전직 총리들과 똑같이 앞으로 매년 11만5000파운드(약 1억9000만원)의 총리 연금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 비호감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현지 언론들도 ‘양배추 유통 기한보다 짧은 임기를 지낸 총리’라며 조롱하고 있다.

일러스트=유현호

트러스의 실패는 최근 세계 각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여성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여성 리더의 숫자는 급증하고 있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적은 탓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그 답을 독일 첫 여성 총리를 지낸 앙겔라 메르켈(68)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트러스와 달리 메르켈은 동독 과학자 출신이라는 정치 비주류의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중동 난민 사태, 코로나 등 여러 위기를 넘기며 독일 최장수 총리(2005~2021년) 집권 기록을 남겼다. 트러스는 왜 실패했고, 메르켈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성급했던 트러스, 신중했던 메르켈

메르켈도 집권 초기엔 미숙한 모습을 보이며 정책 실패를 반복했다. 화려한 연설이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해 지지율은 40% 안팎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총리에서 물러날 때 그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트러스와 달리 ‘롱런’할 수 있었던 메르켈의 비결은 ‘신중함’이었다. 메르켈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 일관되게 최후의 순간까지 결정을 미루다가 실행에 옮겼다. 정치적 성과에 집착해 무턱대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대신 전문가 분석과 여론 의견을 수렴해 정책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한 것이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평전 ‘앙겔라 메르켈’(사람의집)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 체육 수업 때 3m 높이 수영장 스프링보드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업 종료 종이 울리는 순간 뛰어내렸다고 한다. 가장 안정적으로 다이빙할 수 있는 최적의 발판 위치를 찾기 위함이었다.

트러스와 대비되는 또 다른 메르켈의 정치력은 포용의 리더십이다. 메르켈은 동독 출신, 여성이라는 신분적 제약 탓에 소속 당인 기민당에서도 ‘마이너리티’(소수자)였다. 하지만 이런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었다. 그는 임기 동안 ‘코끼리 결혼식’으로 불리는 중도우파 성향 기민기사당, 중도좌파 사민당 간 대연정을 세 차례 단행했다. 독일 정치 역사상 대연정은 4차례뿐이었는데 이 중 3번이 메르켈 집권기에 이뤄진 것. 반면 트러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층을 의식한 포퓰리즘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자멸했다.

정치가로서 깨끗한 이미지도 메르켈의 입지를 단단하게 했다. 메르켈은 재임 기간 관저 대신 개인 아파트에서 출퇴근하고 주말이면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요리했다. 아파트 전기세와 수도세는 남편(대학교수)과 나누어 냈다. 메르켈은 한국 대통령 일가에서 흔하게 일어났던 친인척·측근 비리 스캔들도 16년 집권 기간 한 차례도 없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과)는 “메르켈은 기업규제 완화 등 전통 보수 우파의 이념을 실천하면서도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사민당 정권의 틀을 유지해 좌우 균형의 맥을 짚었다”며 “트러스는 보수층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는 조급함과 강박관념 탓에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여 실패했다”고 말했다.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을 펴낸 바 있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메르켈은 집권 초반엔 인기가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별화된 리더십으로 높은 인기를 얻은 독특한 사례”라며 “과거 독일 정치는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전임 남성 총리 영향으로 마초적인 풍토가 강했는데 메르켈이 화려한 수사 대신 국민들에게 조곤조곤 정책을 설명하는 섬세한 면을 보인 것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어설픈 ‘대처 흉내내기’의 비극

트러스 전 총리는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제2의 대처’로 평가받던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말투와 옷차림, 사진 찍을 때의 손동작까지 대처 전 총리를 똑같이 따라 하는 전략으로 ‘강한 영국’을 그리워하는 보수층의 표심을 파고든 것. 지난 7월 보수당 대표 후보 토론에선 흰 셔츠에 하얀 보 타이를 맸고, TV 토론회에선 영국 왕실 상징인 로열블루 계열의 원피스에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하고 왼쪽 가슴엔 브로치를 달았다. 모두 대처가 총리 시절 즐겨 입던 패션이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감세안을 비롯,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모습도 대처와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70·80년대 영국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한 대처와 달리 트러스는 무모하게 감세안을 밀어붙이다 실패했다. ‘세금을 줄여 영국 경제 성장을 견인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그의 감세 정책은 정반대 결과로 이어졌다. 감세로 재정이 줄어들 경우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채 발행이 급증할 것이란 전망에 영국 국채 가격이 급락했고, 파운드화 가치도 한때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 세수 감소에 따른 재원 마련 방안도 부족했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는 “대처는 영국에서 이름 뒤에 ‘주의(-ism)’라는 말(대처리즘)이 붙는 유일한 정치인이었을 만큼 국가 정책에 탁월한 면모를 보여줬다”며 “대처는 확실한 분석과 팩트에 기반한 정책으로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비전을 소신껏 펼쳤지만 트러스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여성 정치인에 가혹한 현실도

남성 위주의 경직된 정치 풍토도 성공한 여성 지도자가 활발히 배출되지 못하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여성 지도자들은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더 큰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안게 된다는 것.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2019년 최연소(당시 34세) 총리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지난 8월 파티에서 춤추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총리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난 여론에 밀려 마약 검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후 “개인 시간에 유흥을 즐긴 것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논란이 커졌다”는 옹호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음주 등 정치인의 일탈에 유독 여성에게 더 가혹한 비난이 가해지는 경향이 있다”며 “마린 총리가 파티 동영상 유출로 총리 자질 논란까지 거론된 것 역시 이 같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형준 교수는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은 한국이 유럽보다 심각하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이를 여성 정치인 전체의 실패로 규정하면서 ‘여성 대통령은 안 된다’는 부정적 여론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실력 있는 여성 정치인을 배출하려면 20대 청년 정치인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회의원, 장관직의 여성 비율을 인위적으로 맞추기 위해 선거나 개각 때마다 외부에서 여성 인재를 영입하는 것보다 청년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핀란드, 스웨덴 등 스타 여성 정치인을 다수 배출하는 북유럽에선 여성 의원 비율이 40%가 넘는데 이는 대학생 때부터 능력 있는 정치 꿈나무들을 영입해 키운 결과”라고 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좋은 지도자는 단순히 성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 대통령’, ‘여성 총리’ 배출에 지나치게 집착해선 안 된다”면서도, “다만 뛰어난 여성 정치인이 늘어나려면 육아, 경력 단절 등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