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동탄의 더샵레이크에듀타운 주민들은 지난 7월 초 뜻밖의 침수 피해를 겪었다. 장마나 태풍 때문이 아니었다. 한 입주민이 자신과 지인의 아이들을 위해 아파트 단지 화단에 공기를 넣어 설치하는 대형 에어바운스 수영장을 가져다 놓고 온종일 이용하다 물을 버리는 바람에 배수구가 막혀 일대가 물에 잠겼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수차례 수영장 철거를 요청하고 다른 주민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항의 글을 올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만 좀 해라. 6시까지는 꼭 물놀이 해야겠다”며 강행했다. 이후 ‘동탄 워터파크 무개념 부모’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가 올라오자 이 입주민은 뒤늦게 사과문을 올리고 “모든 피해를 배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7월 경기도 동탄 아파트 단지 화단에 한 주민이 수영장을 설치한 모습. 물을 버리다 주변 화단이 침수됐다. / 온라인 커뮤니티

주변 시선에 아랑곳없이 이웃에 피해를 끼치는 이른바 ‘아파트 빌런(악당)’이 늘고 있다. 분야도 다양하다. 공용 복도에 음식 쓰레기나 개인 물건을 둬 악취를 풍기거나 통행을 방해하는 건 그나마 참을 만한 수준. 다른 사람이 주차를 못 하도록 특정 칸에 주차 금지봉을 설치해 이웃을 골탕 먹이거나, 폐기 과정이 번거롭다며 고층 아파트에서 가구를 창 밖으로 던져 버리는 등 주민 안전을 위협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피해를 견디다 못 한 일부 주민이 아파트 악당들을 응징하는 ‘참교육’에 나서기도 하지만 대부분 현행 법으로 단속이나 처벌하기 어렵다 보니 민폐 행위는 끊이지 않고 있다.

공용 공간인 아파트 계단 난간에 주민이 시래기를 널어 말리는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내 차는 소중해’... 1대로 3칸 차지

아파트 빌런의 단골 출몰 지역은 주차장이다. 지난 2018년 발생한 ‘인천 송도 캠리 불법 주차 사건’이 원조 격. 50대 여성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자기 차에 주차 위반 딱지를 붙인 데 반발, 주차장 진입로에 차를 세워두고 나흘 동안 잠적했다. 이후 주차 카드 발급 문제로 관리사무소와 다투다 14시간 동안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 차를 세워둔 ‘평택 길막 사건’ 등 비슷한 ‘모방 범죄’가 잇따랐다.

이달 초 경남 지역 한 아파트 단지에서 벤츠 한 대가 3칸을 차지해 주차하자 다른 주민들이 벤츠 앞뒤로 차를 대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은 모습. / 온라인 커뮤니티

최근엔 차 1대가 주차장 여러 칸을 독차지하는 ‘가로 주차 빌런’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주차장 바닥에 표시된 구획선에 맞춰 차를 세우지 않고 주차 칸을 가로질러 세우는 것이다. 다른 차가 자기 차 옆에 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달 초 경남 지역 한 아파트에선 벤츠 한 대가 가로 주차로 3칸을 독차지해 주민들 공분을 샀다. 분노한 일부 주민이 벤츠 앞뒤로 차를 대서 못 빠져나가게 하자 벤츠 차주는 경찰에 그 주민을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 벤츠 차주가 다른 아파트 단지에 산다는 사실이 밝혀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민폐 주차를 일삼는 사람들은 부적절한 사후 조치로 더욱 비난을 받는다. 경기도 김포에 사는 자영업자 서모(52)씨는 지난달 출근길에 자기 차 앞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놓은 채 주차한 SUV를 발견했다. 서씨는 상대 차주에게 수차례 전화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택시를 타고 출근했는데 저녁이 돼서야 차주에게 ‘욕만 들을 것 같아 일부러 연락 안 했다’는 황당한 문자를 받았다.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은 “입주민이 드나드는 주차장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도 ‘벌금 낼 테니 참견 말라’ ‘동대표가 허락했다’며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 밉상도 있다”고 했다.

◇배달 음식 가로채고, 놀이터에서 텐트 말려

아파트 빌런들의 테러는 주차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회사원 장모(42)씨는 최근 새벽 1시에 자기가 시킨 배달 음식을 다른 사람이 낚아채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장씨는 “아파트 입구 CCTV를 봤더니 같은 동에 사는 여자가 배달원에게 돈을 내고 내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갔다”며 “주변에 물어보니 배달 주문이 많은 새벽에 1층에서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자기가 주문한 것처럼 속이고 계산하는 경우가 더러 있더라”고 했다. 실제 온라인에선 ‘남이 시킨 배달 음식 먹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배달 음식을 중간에 가로채는 경험담을 올린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한 작성자는 “음식 내용물이 뭔지 뜯어보는 재미가 있어 여러분도 배고플 때 써먹어 봐라. 현금 결제라 못 잡는다”며 권했다.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한 주민이 텐트를 설치해 말리고 있다. / 온라인 커뮤니티

주민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못된 이도 늘고 있다. 여름휴가 기간 사용한 텐트를 아파트 주차장에 펼쳐놓고 말리는 식이다. 어린이 놀이터 기구에 텐트를 빨래처럼 널어놓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 계단 난간에 시래기를 널어 말리거나 단지 내 인도와 주차장에 고추를 깔아놓는 것 역시 공용 공간을 침해하는 행위로 최근 많은 아파트 단지에서 금하고 있다.

◇‘벌 안 받는다’ 생각하는 촉법 소년 심리

아파트 빌런이 자꾸 출현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2000년대 들어 국내 아파트 단지가 점차 대형화하면서 ‘익명성’이 커진 탓이라고 보고 있다. 가구가 많으니 ‘나 하나쯤이야’ 하는 경향이 강해져 다른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둔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승우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한곳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짧아지면서 이웃과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분쟁 대부분이 법적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점도 얌체 행위를 부추긴다. 민폐 주차나 층간 소음은 아파트 단지라는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보니 공권력이 개입해 처벌할 여지가 없다는 것. 예컨대 현행 도로교통법과 주차장법에 명시된 규제는 일반 도로와 노상 주차장 같은 공공 영역에만 적용된다. 양승우 교수는 “주차 공간을 가로질러 차를 세우는 이들은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욕을 먹더라도 편한 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이라며 “이는 마치 잘못을 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 소년(만10~14세)과 같은 심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각종 민폐 행위는 자체 규약을 통해 다스리는 방법밖에 없다. 주차 위반을 했을 때 관리비를 추가로 부과하는 식이다. 일각에선 아파트 단지가 비록 사적 공간이라도 일부 법적 제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부 싸움이나 가정 폭력도 과거엔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동 학대 우려로 신고가 있을 때 적극 개입한다”며 “수많은 아파트 입주민의 권리를 지키는 차원에서 공권력이 아파트에 불법 주차한 차를 견인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