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용산구의 한 종합사회복지관 대강당에서 수강생들이 벽면에 있는 거울을 보며 워킹 자세를 연습하고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종합사회복지관. 328㎡(약 115평) 넓이 강당엔 클럽에서나 나올 법한 EDM(전자음악)이 심장을 쿵쿵 울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거울로 채워진 벽면 앞에서 2명씩 짝 지어 활보할 준비를 하는 이들은 ‘시니어 모델’ 수업을 신청한 24명의 수강생. 1973년생 막내부터 최연장자인 1938년생까지, 평균 연령이 71.5세다. 용산구 거주민이 가장 많지만, 강 건너 서초동과 경기 과천에서 원정 온 수강생도 있다. 전업주부, 유치원 원장, 자영업자, 임상병리사 등 직업도 천차만별. 이들을 묶는 공통분모는 단 하나, 1주 후 진행하는 종강 패션쇼 런웨이 무대를 멋지게 소화하고 모델로 거듭나는 것이다.

수업은 무료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50세 이상일 것. 모델이 되고 싶은 열정도 필수다. 고교 동창 둘과 나란히 등록한 최향숙(61)씨는 “자세 교정에 도움이 될까 해서 신청했는데, 가능하다면 시니어 모델로 활동도 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세월의 중력장에 굽은 몸, 나이테처럼 새겨진 주름도 개의치 않고 이들이 모델에 도전하는 까닭은 뭘까.

첫 수업이 있던 지난 6일 오후 3시. 음악이 흐르자 엉거주춤 서 있던 수강생들 얼굴이 묘한 기대감으로 상기됐다. 모델의 기본인 꼿꼿한 자세를 위한 스트레칭과 워킹 중 가장 기초가 되는 4박자 워킹을 배우는 날. “하나, 둘, 셋, 넷!” 구호에 맞춰 무릎을 직각으로 굽힌다. 굽혔던 다리를 앞으로 쭉 뻗는다. 다리를 내려놓고 반대편 다리를 들어 올리는 과정의 반복, 또 반복이다. 로보트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 네 가지 동작을 매끄럽게 연결하면 기본 워킹이 된다. 몇몇 수강생은 다리를 들어 올리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의 한 종합사회복지관 대강당에서 수강생들이 벽면에 있는 거울을 보며 자세를 교정하고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강사와 보조강사가 수강생들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워킹을 도왔다. 같은 쪽 팔 다리가 동시에 나가 뒤뚱대는 수강생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는가 하면, 무릎이 올라가지 않는 수강생은 옆에서 다리를 받쳐 주기도 했다. 강행군에 수업 10분도 지나지 않아 무릎을 통통 두드리며 마사지하는 수강생부터, 자주 의자에 걸터앉는 수강생도 있었다. 그래도 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각도가 생명이에요. 터덜터덜 걸어가는 건 그냥 아버지가 원래 걸어가시던 걸음걸이고, 모델이 되려면 무릎을 이렇게 세워주셔야 합니다.”

꽃무늬 시폰 블라우스에 비즈 목걸이로 한껏 멋을 낸 김정화(78)씨는 쉬는 시간에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들뜬 표정으로 “여든이 다 돼 가는 나이지만,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겠고 새로운 도전으로 그간 모르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며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른바 ‘백세 시대’에 시니어 모델 수요가 늘자,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모델 교육과정이 생기고 동네 복지센터와 문화원에도 수업이 개설됐다. 인스타그램에는 ‘시니어 모델’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게시물이 19만6000건 이상 올라와 있다. SBS에서 1992년부터 진행해온 ‘수퍼모델 선발대회’엔 올해 처음으로 만 44세 이상 지원자를 대상으로 한 ‘더 그레이스’ 부문이 신설되기도 했다.

시니어 모델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4년제 학사과정도 있다. 서울문화예술대학교 모델학과 이은미 학과장은 “아이와 남편을 챙기다가 오로지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서 지원하는 전업주부들, 직장을 은퇴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삼아 자아실현을 위해 오는 중년 남성들, 커지는 시니어 문화 시장과 관련한 직업을 꿈꾸는 사람 등 지원 동기가 각양각색”이라고 했다.

평균 나이 63.7세의 시니어 모델 그룹 ‘아저씨즈’가 화보를 촬영하는 모습. / 더뉴그레이

프로페셔널한 시니어 모델 그룹도 생겼다. 2020년 1월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한 ‘아저씨즈’가 대표적인 그룹. 평균 나이 63.7세로, 20년 넘게 봉제 완구 제품을 판매해온 자영업자, LG그룹과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을 30년 넘게 다닌 사람 등 배경도 다양하다. 시니어 모델 에이전시를 표방하는 스타트업 ‘더 뉴 그레이’에서 일반인 남성들을 모델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룹이 결성됐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패션쇼·광고·방송·드라마는 물론 10~2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동영상 플랫폼 틱톡까지 진출해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다. 리더 이정우(66)씨는 “제2의 인생을 사는 방식, 정말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의 양식으로 시니어 모델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늘 작업복 차림으로만 일하던 용접공 출신 김재우(57)씨는 “말 그대로 ‘블루칼라’라 옷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모델이 되면서 일상에서도 나에게 맞는 옷들을 고민하며 찾게 됐다”며 “음치·몸치·박치이지만,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패션도 공부하며 전에 없었던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시니어 모델의 인기에 대해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통적 기준의 성공에 집착했던 중·장년층이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를 중시하고 찾아가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며 “복지관 홈페이지에 패션쇼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기는 등 색다른 시도를 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효용감을 느끼고, 삶에 활력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13일, 두 번째 수업이 끝나기 전 수강생들은 강사 유하형(52)씨가 던진 다이어트 팁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성급한 마음에 식사량을 급격히 줄이지 말고 한 주에 한 숟가락씩만 양을 줄여 위장을 속이셔야 합니다.” 격려도 잊지 않았다. “매주 수업의 결과가 빨리 나오니까 기분이 좋죠? 처음엔 당연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어요. 미흡한 게 당연하죠. 2주 워킹 받았으면 산책할 때도 허리를 쭉 펴고, 남이 보면 ‘저 사람, 모델인가?’ 싶게 배운 것들을 실천해보세요”라고 주문했다.

2주째 수업을 마친 이들의 소감은 어떨까. 사무직에 종사하다 은퇴한 수강생 성모(62)씨는 “모델은 처음이라 힘들지만 워킹 연습을 하고 나니 몸도 개운하고 앞으로의 삶도 풍성해질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강당을 빠져나가던 수강생들은 “우리 15주 차에는 사진 찍는 거야?” “지난 기수들 사진 보니까 근사하던데?”라며 부푼 기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