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퓨리’에서 퓨리 분대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 /소니픽쳐스

극과 극이 통한다면 최고와 최악이 통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유쾌함과 최악의 불쾌함이 통한다고 해도 말이 될 텐데, 따지고 보면 정말 그렇다. 영화 같은 창작물에서는 유쾌함이든 불쾌함이든 극에 이를 경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모르겠으나 영화 속이라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최악의 식사는 결국 최고의 식사’라고. 이를 증명하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퓨리’(2014)다.

‘퓨리’는 제목과 같은 이름의 전차와 탑승 분대원들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이 독일 영토에 진입하는 등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모든 전투에서 이기는 건 아니었다. 특히 전차가 문제였으니, 독일제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미제가 열세를 보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퓨리는 경험과 실력으로 살아남아 대대와 더불어 독일의 한 마을에 진입한다.

희생이 좀 있었지만 대대가 나치의 잔당을 소탕하고 마을을 접수한다. 부대원 모두가 긴장을 풀지만 콜리어 하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신참 일병과 수색을 나선다. 그리고 어느 집에서 숨어 있던 두 젊은 여성을 발견한다. 겁에 질린 두 사람에게 콜리어 하사는 나무 함을 꺼내 들어 조심스레 연다. 덮여 있는 헝겊을 들추자 계란 여섯 개가 나온다. 전쟁통에 계란이라니. 하사가 담배 두 갑과 함께 계란을 건네자 여성들이 받아들고 요리를 시작한다.

그렇게 평온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깨져버린다. 계란 프라이가 중심인 식사가 준비되자 나머지 분대원들이 술에 잔뜩 취해 나타나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콜리어 하사가 신참 일병과 둘이서만 여성들과 함께 있는 것도, 또한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던 계란을 준 것도 못마땅하다. 더군다나 퓨리 분대원 다섯 명에 여성이 둘이니 사람은 일곱인데, 계란은 여섯 개밖에 안 돼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진다. 급기야 어중간한 서열의 분대원에게 계란이 돌아가지 않자 그는 여성을 희롱하고 계란을 빼앗아 침을 잔뜩 발라 돌려준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여성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퓨리’의 전투 장면은 현실적이어서 참혹하지만 카타르시스까지 주지는 않는다. 끔찍하고 유혈이 낭자하지만 보고 있노라면 무감각해져 버린다. 잔혹함이 상상력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기도 하거니와, 꼴이 같은 참상을 계속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 점령 마을에서의 식사 장면이 가장 불쾌한 방식으로 참혹함을 발산한다. 왜 그런 걸까? 일단 불신이 자아내는 불안과 긴장이 있다. 연합군이 마을을 점령해 평온해졌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오래가리라고 믿을 수도 없다.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아무래도 벌어질 것만 같다. 술에 취해 외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불안과 긴장도 덩치를 불린다.

그런 가운데 퓨리의 분대원들은 밥상머리에서 난동을 부려 긴장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한편, 선악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때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를 자아낸다. 물론 나치를 무찌르고 세계의 평화를 찾으려는 연합군은 선이다. 하지만 개별 병사, 즉 인간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특히 승리를 확실히 거머쥔 상황이라면 없다. 무장까지 했겠다, 그럴 때 인간은 퓨리의 분대원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라도 약자를 괴롭히고 유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새로운 힘이자 악 말이다.

콜리어 하사가 칼을 뽑아 던짐으로써, 즉 힘 위에 군림하는 힘이 있음을 부각시켜 줌으로써 긴장은 일단 잦아든다. 하지만 상황이 왠지 그렇게 끝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다시 진군하려는 미군에 포탄이 날아들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방금 식사를 했던 집에 떨어지니 음식을 나누었던 여성들은 폐허 속 시체로 돌변한다. 그렇게 방금 밥을 먹었던 사람이 잔해에 깔린 시체가 된 장면을 보면 긴장감이 풀리고 한숨이 휴, 나온다. 이제 다 지나갔군. 어떤 아름답고 따뜻한 영화 속 식사 장면도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그려내는 한편 이런 카타르시스는 주지 못했다. 그래서 ‘퓨리’의 식사 장면은 정말 최악이지만 그렇기에 최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