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영석

“어른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은?” 아침 출근길에 지인들에게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에 카톡 대화방이 만개했다. 술 마시기! 세계 여행! 밤새도록 TV를 보고 싶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었어요….

출판사 편집자 U는 “독립해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고 대답했고, 잡지사 기자 L은 “외박을 해보고 싶었다” 밝혔으며, 친구 K는 오토바이 타기, 선배 E는 염색하고 매니큐어 바르기, 후배 J는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지극히 정직한 고백을 남겼다. 칼럼니스트 N은 “꼭 어른이 되어야만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면서 “어린 시절에도 ‘지금 해야겠다’ 생각했을 뿐”이라는 의미심장한 답변을 보내왔는데, 과연 철학 전공자다운 실존적(?) 인생관이다.

수다는 이어진다. 편의점 점주 K는 “빨리 돈 벌어 엄마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고 말해 댓바람에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는데, 어쩌나, K의 어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셨다. 그런가 하면 선배 H는 “어른이 되면 얼른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었다”고 대답해 나를 놀라게 했는데, “매일 영어책을 10번 읽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어 그랬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토록 영어를 싫어한 H가 지금은 방송에서 중국어 강좌를 진행하는 강사이며 팔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인생의 즐거운 아이러니 아닌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제가끔 소원을 이룬 성공한 인생이다. U는 독립해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고 있고, L은 실컷(?) 외박하고 있으며, E는 갈색 머리에 은색 매니큐어를 발랐고, N은 하고 싶은 말을 용기 있게 칼럼으로 쓰면서 살고 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인생에 하나 있으니 어른이 되는 일이고, 누구나 되지만 제대로 되기 어려운 일이 또 하나 있으니 역시 어른이 되는 일이다.

의뭉스레 왜 갑자기 어른 타령이냐면 ‘포켓몬 빵’ 때문이다. 요즘 편의점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포켓몬 빵과 벌이는 전쟁이다. 하루에도 숱하게 손님들이 찾아와 “포켓몬 빵 없어요?”라고 묻는 바람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포켓몬 빵 없습니다.” “포켓몬 빵을 찾아 여기까지 왔구나. 자, 그럼 다음 편의점으로 이동하렴.” “아쉬운 대로 쿠키런 친구들을 데려가는 건 어떻겠니?” 품절을 알리는 익살스러운 안내문도 편의점마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포켓몬 빵 품귀현상이 계속되는 4월 6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영업시간에 맞춰 포켓몬 빵을 구매하고 있다. /뉴시스

이게 빵을 먹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봉지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으려는 것이다.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스티커라는 뜻에서 ‘띠부띠부씰’이라고 하는 녀석. 159종이나 되는 포켓몬 캐릭터 그림이 랜덤으로 들어 있다. 그 띠부씰을 구하려고 마트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 들어가는 ‘오픈런’이 유행이고, 일부 마트에서는 1인당 구매 한도를 정해 놓고 번호표까지 나눠주고 있으며, 편의점 물류 배송 트럭을 따라다니며 갓 들어온 빵을 싹쓸이하는 ‘트럭 추격전’도 이어진다. 요즘 아이들이 왜 그토록 스티커에 열광하느냐고? 아니다. 열광의 주인공은 20~30대 어른들이다.

띠부씰이 들어있는 포켓몬 빵은 1998년 처음 등장해 2006년에 단종되었던 것을 얼마 전 다시 출시하였다. 당시에도 매월 5백만개씩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그때는 분명 어린이였던 고객들이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그때는 용돈으로 살아가느라 쉬이 모을 수 없었던 스티커를 지금은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산 물건’이라는 뜻) 맘껏 수집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어른이 되면 하고 싶었던 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할까. 게다가 희귀한 띠부씰을 건져내면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판매할 수도 있으니 코로나로 답답한 요즘 세상에 이 얼마나 재미난 일인가. 주식 시황 살피듯, 오늘도 띠부씰 거래가를 살핀다.

말이 나온 김에 친구들에게 ‘어른이 되면 실컷 먹고 싶었던 것’을 물으니 치킨, 핫도그, 떡볶이, 햄버거 등 다양한 음식이 등장했는데, 어릴 적 나는 ‘아폴로’라는 과자를 실컷 먹고 싶었다. 대롱 안에 든 달콤한 것을 쭉 빨아 먹는 과자였는데 엄마는 불량 식품이라며 못 먹게 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 생기면 쪼르르 문구점으로 달려가 아폴로 한 봉지 사 들고, 책상 서랍 안에 숨겨놓고 어찌나 맛있게 쪽쪽 빨아 먹었던지.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별 쓸모도 없는 그 투명한 대롱을 잔뜩 모아두는 변태적 취미가 있었다.

“포켓몬 빵 있어요?” 하는 ‘어른이’(어린이 같은 어른이라는 뜻) 몇 명을 돌려보내고 나는 아폴로 한 봉지를 호기롭게 뜯는다. 지금 우리 편의점에선 아폴로 과자를 팔고 있다. 어른이 되면 박스째 쌓아두고 먹어야겠다 다짐하곤 했는데 40년 가까운 세월 지나 비로소 쌓아두고 팔고 있으니, 때때로 내 맘대로 먹고 있으니, 나 역시 성공한 인생 아닌가.

그나저나 SPC삼립 사장님, 포켓몬 빵 좀 왕창 만들어주세요. 편의점 하나당 하루에 두세 개씩 배급이라니, 점주들도 손님들도 이만저만 애간장이 타는 게 아니랍니다. 설마 ‘밀당’ 하듯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요? 내일은 뮤(띠부씰 가운데 가장 희귀한 캐릭터)를 건지는 날이 되길,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