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혜장국’의 한우 육개장과 한우 수육./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고3 내내 새벽 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밤 10시 30분이 되면 학교에서 나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뭐든 먹었다. 야간자율학습 시작 전 큰 과자 한 봉지를 비웠다. 늦게 집에 들어가도 배고플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늦은 밤에도 밥상을 차렸다. 언제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머니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어머니는 같은 질문을 며칠째 던지다 마침내 그쳤다. 나는 늘 “아무거나”라는 의미 없는 답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밥상에 올라온 음식은 육개장이었다. 손으로 찢은 소고기와 고사리, 파가 잔뜩 들어간 육개장에는 빨간 기름이 동동 떠 있었다. 반찬은 김치와 어묵볶음이었다. 밥 한 공기를 그대로 말아 숟가락질을 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막막함, 허공에 발을 내딛는 것 같은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 위장을 채우는 뜨끈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깨끗이 밥상을 비웠다.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밤마다 육개장을 끓였다.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은 많다. 하지만 배부름 이상으로 넘쳐흐르는 힘을 주는 건 육개장이 아니면 안 됐다. 아마 점심마다 서울 마포 광흥창역 인근 ‘서강식당’에 자리 잡는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동네 이름을 가게 간판에 건 이 집은 삼겹살부터 대구탕, 육개장까지 만들 수 있는 음식을 거의 다 판다. 예전에는 게장과 보쌈까지 했던 것 같지만 그 흔적은 입간판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들어서면 머리를 바짝 뒤로 넘긴 중년의 여자들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이음매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육개장이 어느새 앞에 놓였다. 길게 썰어 넣은 파가 국물에 수북했다. 국물에는 파의 하얀 부분에서 새어 나온 단맛이 타령 소리처럼 길게 뽑혔다. 매운맛이 넘실거리는 국물 밑에는 잘게 찢은 소고기가 또 한 움큼 들었다. 보통 육수가 밀도 있게 뽑히면 시원하게 넘어가는 맛이 덜하다. 이 집은 국물의 밀도감이 느껴지면서도 속을 막힘 없이 뚫고 내려가는 쾌감이 함께 있었다. 바삭하게 구운 김을 하얀 밥에 올리고, 빨간 국물에 김치를 곁들이는 점심 나절이 반짝하고 지나갔다.

마포에서 충무로로 넘어가면 ‘진고개’가 있다. 충무로의 옛 이름을 상호로 쓰는 이 집은 사대문 안 손꼽히는 노포이기도 하다. 깨끗하게 닦인 테이블, 유니폼을 갖춰 입은 종업원들은 진고개의 업력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게장부터 갈비찜까지 한국 음식 전반을 다루지만 저녁 나절이라면 역시 곱창 전골이 우선순위에 오른다. 가스버너 불을 올리니 잘 손질된 곱창에서 빠져나온 쌉쌀한 맛과 매콤한 양념이 모여 퇴근길 사람들 가슴 왼편을 파고들었다. 단맛이 은근한 국물은 한 수저 두 수저 들수록 맛이 더해졌다. 국물 농도가 짙어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에 리듬이 실렸다.

보통 대파를 써서 국물을 우리는 여느 집과 달리, 이 집은 육개장에 쪽파를 한 움큼 넣어 국물을 냈다. 중력에 의해 바닥 한 가득 깔린 소고기를 보니 예전 같은 인심에 일순 마음이 놓였다. 이 집은 모든 음식에 생강을 비롯한 향신료의 향이 지배적이란 것도 특징이다. 육개장도 마찬가지였다. 넉넉히 들어간 당면, 그리고 삶은 달걀 하나가 통째로 들어간 육개장 국물은 걸쭉하지 않고 깔끔하고 예리한 맛을 품었다.

한강을 건너 신논현역 근처로 넘어가면 요즘 새롭게 문 연 ‘혜장국’이란 곳이 있다. 크게 달린 간판은 야심이 넘쳤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옛 식당처럼 천장이 낮고 좁았다. 그 사이에 비집고 앉아 땀을 흘리며 육개장을 먹는 사람들은 체격이 컸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점심에 한정으로 내놓는 한우 수육은 값에 비해 양이 충분했다. 투플러스 한우만 쓴다는 안내문이 가게 곳곳에 붙어 있다. 수육 한 점을 먹자마자 녹아 내리듯 결결이 흩어지는 식감에 그 출신이 어디인지 머리보다 혀가 먼저 알았다.

값이 비록 비싸다 하더라도 주인공은 수육이 아니라 육개장이었다. 육개장을 건더기 고기 부위에 따라 일반, 특차돌, 일품 등으로 나눈 것만 봐도 그랬다. 무와 파를 넣어 끓인 국물은 엿기름처럼 뭉근한 단맛을 지녔다. 공기에 담긴 밥은 알알이 윤기가 나고 단단해서 국물에 넣자마자 스르르 몸을 풀었다. 소기름의 고소한 풍미에 고추기름의 진중한 매운맛이 올라탔다.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소고기는 숟가락질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부딪혀 국물 위로 올라왔다. 따로 낸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으니 맛에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도중에 먹기를 멈출 방법은 없었다. 오래전 그날 밤처럼 육개장 한 그릇을 비웠을 때 내 몸에 도는 피가 조금은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때로 음식은 칼로리 이상이다. 음식에 담긴 힘을 믿는다는 것은 숫자 너머 무언가를 본다는 뜻이다. 늦은 밤 육개장을 끓이던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조금은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서강식당: 파육개장 1만원, 대구탕 1만1000원. (02)332-2312

#진고개: 육개장 1만1000원, 곱창전골 2만5000원. (02)2267-0955

#혜장국: 한우 육개장 1만·1만3000원, 한우 수육 2만7000원. (02)595-3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