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다른 작가들과 같이 낸 책에서 나는 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그저 그럴 때도 마시는 게 술이라고. 그건 인생과도 같지 않냐고도 적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저 그럴 때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마시는 거라고 말이다.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책과 책 사이에 삶이 끼어들듯, 술과 술 사이에 삶이 끼어드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도 좋다. 삶과 삶 사이에 책이 끼어들듯이 삶과 삶 사이에 술이 끼어드는 것이라고도. 원래부터 이렇게 갸륵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마시는 게 술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칵테일 네그로니는 드라이 진, 캄파리, 스위트 베르무트를 1:1:1로 섞고 얼음을 넣어 만든다. /핀터레스트

어느 날 갔던 연세대 앞 술집 바텐더의 말이다. ‘어느 날’이라고 썼지만 아득히 먼 옛날이다. 코로나 시대 이전의 일이므로.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처럼 그것은 코로나 19 이전의 일이다. ‘BC(Before Corona) 시대의 술집’이랄까.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고, 그래서 마치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토기를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그 일을 떠올리고 있다.

직접 들은 건 아니다. 책에서 읽었다. 바텐더이면서 술집 주인인 그분이 하시는 술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분께서 쓰신 책을 샀다. 칵테일에 대한 책이었다. 그분이 술에 관한 책을 썼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는 술 책을 모으는 사람이니 살 법했지만 나는 또 아무 책이나 사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에서 그가 타주는 술을 마시고, 그가 짜놓은 메뉴판을 보고,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련된 바는 아니었다. 술 상자와 비품 상자가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조도는 지나치게 낮았다. 나 말고 다 남자였다. 랩실에서 바로 후드를 걸치고 탈출한 대학원생과 사회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학교 앞이 편해 퇴근하고 온 직장인 같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바텐더이자 주인인 그분이 독보적이었다. 그는 술을 말면서 손님보다 더 말을 많이 했고, 술집이 연극무대라도 된 듯이 종으로 횡으로 배회했다. 손에는 고든스 진 한 병이 들려 있었는데, 병목을 잡고 입에 콸콸 부으면서 술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말을 했다.

바 밖으로 나와서 말이다. 바텐더가 바 밖으로 나온 걸 난 그날 처음 보았다. 라디오 디제이가 녹음 부스에 있듯이 바텐더는 바에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목소리에는 울림이 있고, 표정은 절실해 그는 연극배우로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대를 휘적휘적 누비며 대사를 쳤다. 그러면서 리어왕을 연기하는 이언 매켈런이라도 된 듯 형형한 눈빛을 나를 포함한 술집의 관객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이 술 책을 내신 분이라는 건 알아서 그 술집도 가게 되었던 것인데, 그가 내주는 술을 마시니 그가 쓴 책이 절실하게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책에 이 표현이 있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네그로니.’

내가 그날 마신 세 잔의 칵테일 중에 첫 잔이 네그로니였다. 나는 네그로니를 좋아하고, 그래서 네그로니가 있는 집이라면 일단 시키고 본다. 집에서 내가 만들어 마시는 네그로니도 꽤나 괜찮지만 남이 만들어 주는 네그로니도 좋다. 네그로니는 세 가지 술을 섞는 칵테일이다. 캄파리와 스위트 베르무트(영어로는 ‘버무스’라고 한다.), 드라이 진을 섞는다. 보통 1:1:1로 섞고 얼음을 넣는다. 그러고는 가볍게 젓는다. 네그로니의 세계에서는 셰이커를 난폭하게 흔드는 일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살짝 저으면 된다. 얇게 저민 오렌지 한 조각을 잔의 테두리에 끼우기도 하고 잔 속에 살짝 비튼 오렌지 껍질만을 넣기도 한다.

주저하지 않고 네그로니를 시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 집이 이걸 꽤 잘해요.”라고. 상당히 거만한 목소리로. 때로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좋다. 뭐랄까. 그는 주관적이고 또 주관적이었다. 내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봐 눈치를 보며 말의 수위를 조절하는 ‘피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같지 않았다. 그 기백이 좋아서 웃음이 터졌다. 네그로니에 진심인 사람답게 나는 그가 어떤 조합으로 술을 만드는지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허락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에 그 칵테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리적 추론이랄까. 과연, 있었다.

그는 네그로니를 이렇게 표현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로, 언제 마셔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고. 나 역시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 네그로니이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말이 마음에 들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모두 좋은 술이라는 문장이었다. 아, 그래. 그랬지. 이 술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모두 좋은 술이었지! 그리고 살짝 눈물 같은 것이 났는데, 아마 힘들었었나 보다.

‘바텐더’라는 말은 오묘하다. ‘바(bar)’와 ‘텐더(tender)’라는 말이 결합되었는데, ‘텐더’에는 온갖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부드러운’ ‘연한’ ‘상냥한’ ‘다정한’ ‘애정 어린’이라는 형용사와 ‘부드럽게 하다’ ‘소중히 하다’ 같은 타동사를 생각하면 무릎이 녹는 느낌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감미로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바텐더라는 단어를 발음할 자격을 박탈당할 것 같은 느낌. 감미로워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소리를 낮추고, 그윽한 눈빛과, 손에는 술잔을 들고. 귓가에는 압도적으로 감미로운 나머지 혈당 과다가 될 듯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바텐더는 바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루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고, 하루 중에서도 밤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마음에 대한 최고의 기술자랄까.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정신상담일 수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라이벌은 바텐더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연세대 앞 술집의 바텐더는 이런 감미로움과는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바텐더를 생각하면 그가 떠오르고, 어쩔 수 없이 그는 감미로워진다. 아마도 네그로니 때문이겠지. 밤은 부드러우니까,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