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도곡동 사무실에는 그가 제작하거나 수입했던 영화 포스터들이 극장처럼 붙어 있었다. 이 회장은 영화 포스터 앞에서 어색하게 포즈를 취했다. "이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데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아직도 수줍어 가지고, 허허허!"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뒤로 넘긴 머리에 셔츠를 풀어헤친 남자가 사막의 모래 언덕 사이로 거칠게 차를 몰며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그린 안성기·장미희 주연의 영화 ‘깊고 푸른 밤’은 1980년대에는 파격적인 미국 올 로케이션 촬영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는 외화 수입 쿼터를 확보할 목적으로 찍어내듯 만든 에로 영화가 판치던 시기. ‘깊고 푸른 밤’은 대규모 예산을 투자해 한국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대종상·백상예술대상을 휩쓸었다.

1970년대부터 한국 영화 80여 편을 제작한 동아수출공사 이우석(86) 회장은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자랑스러운 영화로 ‘깊고 푸른 밤’을 꼽았다. “아무도 해외 로케이션 촬영은 엄두를 못 낼 때였다. 촬영 허가도 쉽게 안 해줄 때여서 애로 사항도 많았다. 그래도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였다.”

미국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한 영화 '깊고 푸른 밤'의 한 장면. /동아수출공사

동아수출공사는 ‘바람 불어 좋은 날’ ’겨울나그네’ ‘칠수와 만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등 한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김기영·이장호·배창호·곽지균·박광수·홍상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이 동아수출공사를 거쳐 갔다. ‘늑대와 춤을’ ‘원초적 본능’ 등 그가 들여온 외화도 150여 편. 무명 시절부터 성룡의 작품을 들여오기 시작해, 대스타가 되고 나서도 성룡이 ‘아버지’라 부르며 이 회장을 따를 정도였다.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을 대만에 수출해 한류의 토대를 닦았고, TV 드라마 ‘판관포청천’을 들여와 시청률 30%를 넘어서는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회장은 한국 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한국의 스토리 콘텐츠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까지 그 기틀을 다졌던 제작자를 지난달 만났다.

-영화계에선 ‘한류의 원조’라고 한다. 처음 영화를 접하게 된 건 언제였나.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친구 아버지네 무역 회사에서 심부름을 시작했다. 그때 외국 영화 수입권을 사오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처음으로 영화라는 걸 알게 됐다.”

-떠돌이 생활이라니?

“세 살 때 징용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열 살 때까지 살았다. 일본에서 학교에 입학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심하게 당했다. 그때 몰매를 맞은 후유증으로 이비인후과 수술을 수차례 받고,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일본에 오래 있다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맞아 죽겠다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해, 해방되던 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이번엔 한국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결국 국민학교 5학년까지밖에 못 마쳤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열다섯에 집을 나와서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열다섯에 집을 나와 무슨 일을 하셨나.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얻어먹다시피 했다. 부유한 집에 들어가서 애들도 봐주고, 심부름도 하면서 지냈다.”

-비뚤어지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일본에서의 일들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일본에 복수하려고 밀항 계획까지 세웠다. 매번 가려고 할 때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결국 포기했지만…. 뭐라도 해서 일본에 복수해야겠단 생각으로 버텼다. 영화 일을 시작했을 때도 일본 영화를 뛰어넘는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욕망이 컸다.”

-그러다 1970년에 동아수출공사를 세우신 건가.

“6·25 전쟁이 터지고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길가에 점치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나보고 투기 사업을 해야 돈을 번다고 했다. 무식해서 그때는 투기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니 할머니가 당시 부산의 동아극장을 가리키면서 ‘저런 걸 해야 한다’고 하더라. 동아극장 이름을 따서 회사를 세웠다(웃음).”

-수입했던 외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내 목숨을 구해준 작품이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이었다. 그전까지 연이어 영화를 말아먹어서 굉장히 힘들었다. 당시에 ‘늑대와 춤을’이 아카데미상을 받아서 이 영화를 들여오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보통 외화 하나에 1만~2만불 주고 들여왔는데 이 영화는 8만불을 주고 들여와서 결국 성공했다.”

-서로 좋은 영화를 수입하려고 견제도 심했겠다.

“한번은 호주 시드니 영화제를 갔다 오다가 비행기에서 싸움이 붙기도 했다. 비행기에서 짐을 올리고 있는데 모 영화사 대표가 뒤에서 냅다 달려들더라. ‘으악’ 하고 쓰러지니까 ‘내가 하려던 영화를 왜 뺏느냐’면서 주먹질을 하는 거다. 당시에 내가 007시리즈를 독점하다시피 들여오고 있어 불만이었던 거지. 스튜어디스가 와서 ‘싸우려면 내려서 싸우라’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내 제작사의 영화 제작과 수출 실적에 따라 수입 쿼터를 배정했다. 외화로 벌어들인 수익을 국내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회장도 외화 수입 쿼터를 얻으려 제작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제작을 시작했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나는 제작의 ‘제’ 자도 몰랐으니까 모든 작품이 어려웠다. 무조건 좋은 작가를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이 성공을 거둔 후에 바로 최인호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가까이서 본 최인호 작가는 어땠나.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한번은 영화를 찍겠다고 찾아왔다. ‘작가가 무슨 감독이냐’ 했더니 자신 있다기에 맡겨봤다. ‘걷지 말고 뛰어라’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폭삭 망했다. ‘아이고, 회장님, 미안합니다.‘ 하더라. 내가 거절을 못 해 투자했다가 망한 작품이 많다. 그러지 않았으면 재벌이 됐을 텐데, 하하!”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처럼 파격적인 영화도 다수 제작했다.

“그 양반(김기영)은 아주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나는 제작자로서 돈만 댔지, 연출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아수출공사에서 연출하면 제작비도 깎으려 하지 않고, 연출자가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준다’는 소문이 났다.”

-지금의 넷플릭스도 그렇지 않나.

“하여튼 동아수출공사에서 연출하고 싶다고 감독들이 좋은 작품을 들고 와서 줄을 섰다. 연출하면서도 한 번도 불평하는 감독이 없었다.”

-감독과 싸운 적은 없나?

“한 번도 없다. 감독이 하자는 대로 다 해줬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은 감독도 있었을 텐데.

“물론 있었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얘기해서 작품에 플러스가 되면 했겠지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게 뻔하니까.”

-제일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였나.

“우리 회사 작품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강수연씨와 안성기씨. 뛰어난 연기력에 인성과 친화력까지 갖춘 배우들이었다.”

그는 평생 100편의 영화 제작이 목표였지만, 85편까지 제작한 뒤 은퇴했다.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은 조승우·양동근 주연의 ‘퍼펙트게임’(2011). 당시 그의 소유였던 서울 강남역 동아극장 건물을 판 돈으로 투자한 영화였다.

-이후에 왜 영화를 제작하지 않았나.

“경제적으로 바닥이 드러났다. 한 작품을 만들려면 적어도 50억~60억은 들여야 하는데 대출해가면서까지 영화를 만들 순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만족하자’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최근에 본 영화가 있나.

“은퇴하고 영화를 보질 않는다. 원수가 됐달까. 영화 만들려고 동아극장도 팔고, 강북에 있던 빌딩도 팔고, 서초동에 있던 저택도 팔았다. 이제 조그만 아파트 하나 남았다. 솔직히 더는 영화 보고 싶지가 않다(웃음).”

-영화 ‘기생충’도 안 보셨나.

“안 봤다. 요즘은 야구만 본다, 하하!”

-최근 넷플릭스가 제작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도 전 세계인이 열광하고 있다.

“70~80년대에는 일본 영화 한번 뛰어넘어보겠다는 의지뿐이었는데 이제 우리 콘텐츠가 세계 일류 수준에 이르렀다니 정말 자랑스럽다. 내가 만든 영화처럼 기쁘다.”

이 회장에게 제작자로서 갖춰야 할 능력을 묻자 “돈이죠, 돈”이라는 간명한 답이 돌아왔다. “합동영화사 대표였던 곽정환씨가 그러더라. ‘이 사장, 그렇게 제작비를 많이 들이면 우린 어떻게 하나. 감독들이 네 작품만 하려고 한다’고. 시나리오를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연출자한테 모든 걸 맡기고 아낌없이 투자를 했다. 그게 제작자로서의 유일한 원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