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쌍문동 백운시장에 있는 생선·건어물 가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상우 어머니가 운영하는 생선가게로 나온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여기가 거기 맞죠?”

지난 20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백운시장. 생선과 건어물을 파는 가게 앞에서 30대 여성이 걸음을 멈췄다. 매대 위에 ‘오징어 게임 촬영지’라고 쓴 안내판이 보였다. 드라마에서 ‘쌍문동 수재’로 불린 상우(박해수)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생선가게다. 주인 송점숙씨는 “드라마 덕분에 요즘 손님이 부쩍 늘었다”며 “며칠 전엔 카자흐스탄 특파원이 와서 한참 찍어갔다”고 했다.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인근 편의점도 ‘인스타 성지’가 됐다. 극 중 성기훈(이정재)과 오일남(오영수)이 재회해 소주와 생라면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장소다.

'오징어 게임'에서 상우가 어머니 몰래 가게를 훔쳐보는 장면. 서울 쌍문동 백운시장에서 촬영했다. /넷플릭스 캡처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도,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만화 ‘로봇 찌빠’와 ‘아기공룡 둘리’의 고향이고,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과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의 배경이 된 공간. 서울 쌍문동이 반세기동안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서울 쌍문동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편의점.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이정재)과 오일남(오영수)이 소주와 생라면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장소다. '오징어 게임' 촬영지라는 게 알려지면서 '인스타 성지'가 됐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과 오일남이 편의점에서 만나는 장면. /넷플릭스 캡처

◇골목길 살아있는 서민 동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나도 쌍문동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나물을 팔았다”며 “기훈과 상우의 캐릭터와 가족사에 제 어린 시절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했다. 쌍문동이 극 중 배경뿐 아니라 실제 촬영 장소로 등장하는 이유다. 정기황 도시문화연구소 소장은 “1970~80년대 서울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가 쌍문동”이라며 “서민적이고 정감 있는 골목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장소”라고 했다.

‘응답하라 1988′의 배경도 쌍문동이었다. 연출한 신원호 PD는 당시 “특이하지도 않고 못 살지도 않는 평균적인 동네, 주변 지인들에게 고증을 할 수 있는 동네를 찾던 중 쌍문동으로 결정했다”며 “이웃 간에 오고 가는 따뜻한 정과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 ‘골목’이란 배경을 잡았다”고 밝혔다. 드라마의 중심축이자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이 바로 ‘골목’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서울 쌍문동 골목이 배경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서울 쌍문동 골목이 배경이다.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쌍문동 골목은 아파트로 치면 엘리베이터 같은 진입구이자 공유 공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골목길에 면한 집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줄기에 포도가 달려있는 형태”라며 “골목을 거쳐야만 집으로 가기 때문에 평상을 놓고 앉아서 누가 오가는지 보고, 수다를 나누고, 새벽에 나와서 빗자루로 쓸고 하는 거다. 과거엔 서울에 이런 골목이 많았지만 재개발·재건축으로 거의 사라지고 그나마 옛날 주택가와 골목이 남아있는 곳이라 쌍문동이 부각되는 것 같다”고 했다. 재개발이 상대적으로 덜 됐기 때문에, 서민들의 서울살이를 다룬 작품 배경으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3년 전 쌍문동에 정착했다는 건축가 윤민환 스튜디오 S.A.M 소장은 “북한산과 도봉산, 우이천이 있어서 자연과 가깝고, 옛 양옥집과 오래된 시장들이 남아 있으며, 한 동네에 오래 거주한 주민들이 많아 유대감이 강하면서도 저처럼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게 텃세 없이 대해주는 친근함이 매력”이라면서 “요즘도 틈만 나면 산책을 겸해 동네 탐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고길동이 골목에 서 있는 모습. 김수정 화백이 쌍문동 골목을 모델로 그렸다. /'아기공룡 둘리' 캡처

◇아기공룡 둘리, 로봇 찌빠의 고향

쌍문동은 무엇보다 만화 캐릭터의 명당이다. 1970년대 신문수 화백의 ‘로봇 찌빠’와 1980년대 김수정 화백의 ‘아기공룡 둘리’의 배경이 쌍문동이다. 신 화백에게 쌍문동은 신접살림을 차리고 딸 셋을 낳아 키웠던 곳이고, 김 화백에겐 20대에 경남 진주에서 처음 상경해 둥지를 튼 곳이다. 김수정 화백은 “26년간 살았던 우이천변 주택을 모델로 둘리가 얹혀 사는 고길동씨네 집을 그렸다”고 했다. 1억년 전 빙하에 갇혔던 둘리가 서울 우이천으로 떠내려와 쌍문동 고길동씨 집에서 살게 됐다는 설정이다.

임형남 가온건축 대표는 “1970년대 서울이 팽창하면서 수유리·쌍문동·우이동 쪽으로 집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른바 ‘집장사 집’이라고 하는 단독 주택이 많았는데 집값이 저렴해서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나 신혼부부들이 많이 자리 잡았다”며 “한마디로 서민의 애환이 녹아있는 동네”라고 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거처를 마련한 곳도 이곳이다. 당시 변두리였던 쌍문동 주민들에게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끝이었지만 버스 종점이었고 이후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도심으로 출퇴근하기에도 좋았다는 것이다.

서울 쌍문동 주민들이 우이천변에 조성된 둘리 벽화를 따라 걷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쌍문역에서 수유동 방향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우이천이 나타난다. 만화 속 둘리가 발견된 그 하천. 우이천 쌍문교와 수유교 사이 420m 구간에 둘리 벽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쌍문동 주민들은 알록달록한 둘리 벽화를 옆에 끼고 하천을 따라 즐겨 걷는다. 안중호 전 서울시 한양도성도감과장은 “도봉구청 재직 시절 둘리 뮤지엄과 벽화 거리를 구상하면서 모델로 삼은 곳이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라며 “도쿄도에서 가장 낙후됐던 지역이 지브리 스튜디오를 만들면서 깨끗이 정비되고 관광 명소가 됐다. 문화 콘텐츠가 동네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도봉구는 ‘쌍문동 주민’ 둘리를 위해 지난 2007년 명예 호적등본을 발급하기도 했다.

지난 20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골목에서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정감 넘치는 이름도 한몫

쌍문(雙門)동은 말 그대로 ‘문이 두 개인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얽힌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옛날 한 부부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아들은 자신의 효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었다. 이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아들 무덤 근처에 효자(孝子)문 두 개를 세운 데서 ‘쌍문’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하나. 창동 우체국 근처에 열녀(烈女)문이 두 개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쌍갈래 길에 이문(里門·동네 어귀에 세워진 문)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응답하라 1988′의 신원호 PD는 “무엇보다 쌍문동이라는 이름이 정겹지 않나”라고 했다. 안중호 전 과장은 “얼핏 욕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입에 착착 붙으면서 속 시원한 발음이다. 도봉구청에 15년간 근무하면서 주민들이 어감이 안 좋다고 이름 바꾸자는 건의를 여러 번 했는데, 그때마다 절대 반대했다. 시대가 바뀌니까 이렇게 이름 덕도 보지 않느냐”며 웃었다.

정석 교수는 “동네의 가치가 대중문화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현상”이라며 “이런 동네는 지우고 새로 짓는 재개발·재건축이 아니라, 골목을 유지하면서 집을 고치는 ‘재생’의 방식으로 최대한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