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에 있는 시인의 집필실에 들어서자 진한 묵향(墨香)이 주인장보다 먼저 손님을 맞았다. 글 짓는 이의 공간을 메운 것은 벼루 1000여 점이었다.
“이 돌덩이들이 우주 몇 바퀴를 돌아 어찌 나 같은 백면서생(白面書生)에게 왔는지, 하나하나 깃든 얘기를 상상해 보면 황홀해집니다.” 박물관 수장고 같은 공간에서 시인이 고개 내밀며 말했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근배(81) 시인이다. “시는 어디서 지으시느냐” 물으니 그가 웃는다. “시 공장은 머릿속에 있지요. 폴 발레리가 그랬지요.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고(웃음).”
시인에겐 붙는 수식이 많다. 일가를 이룬 원로 예술가를 대표하는 국가기관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며, ‘신춘문예 다관왕’이다. 서라벌 예술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이던 1961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3사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올해가 등단한 지 60주년. “급제한 지 예순 돌을 기념한 잔치를 회방연(回榜宴)이라 합니다. 등단(登壇)한 지 예순 해 됐으니 회단연(回壇宴)이라고 해야 할지.” 이를 기념해 시인은 시만큼이나 오랜 세월 마음 뺏긴 보물을 풀어놨다. 50년간 애지중지 모은 벼루 1000여 점 중 100여 점을 공개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7일까지 여는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전이다.
벼루 수집은 고아한 취미를 넘어 시인의 운명이라고 했다. “옛 선비들은 이필위경(以筆爲耕·붓으로 글 밭을 간다) 한다면서 벼루를 연전(硯田), 즉 ‘벼루 밭’이라고 했습니다. 일생일연(一生一硯), 즉 평생에 좋은 벼루 하나 갖는 것이 꿈이었고요. 그런데 옥편을 찾아보면 연전은 ‘시인’을 일컫기도 해요. ‘벼루로 글 농사를 짓는 사람’인 거지요.”
일생일연이라 했거늘, 시인은 1000여 점을 모았으니 일생천연(一生千硯)을 이룬 셈이다. “연벽묵치(硯癖墨癡). 벼루에 미친 놈, ‘벼루 또라이’죠. 먹을 돈, 입을 돈 아껴 돌덩이만 모았으니(웃음).”
벼루와는 아픈 개인사에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선준(1911∼1966) 선생.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 그의 시 ‘자화상’ 구절처럼 시인은 아버지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고향 충남 당진에서 유학자이던 조부 손에 자랐다. “할아버지 품에서 천자문 읽고 먹 냄새 맡으며 자랐습니다. 25리 떨어진 학교를 걸어 다니느라 밤에 기진맥진해서 곯아떨어지면 할아버지가 부르셨지요. ‘근배야, 축(祝) 지어라’. 그러면 붓에 침 발라 제사 지방을 썼답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벼루가 다시 그의 삶에 들어온 계기는 1973년 창덕궁에서 열린 ‘명연전(名硯展)’이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소장품 등 명품 벼루 257점이 전시된 것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다. “월급이 10만원, 우리 집이 230만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인사동 통문관에서 100만원 주고 벼루 한 점을 샀습니다.” 반백 년 벼루 수집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때 이중섭 소 그림이 30만원 했어요. 그땐 쳐다도 안 봤죠. 벼루 안 사고 이중섭 소 석 점 샀으면 인생이 달라졌겠죠(웃음).”
시인이 고이 모셔둔 벼루를 한 점씩 풀었다. “이런 벼루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못지않은 귀한 보물입니다. 한·중·일 삼국 중 한국만 있는 벼루인데 한국 사람들이 진가를 몰라요.” 그가 내놓은 벼루는 시커멓고 네모난 돌덩이가 아니었다. 녹두빛, 팥죽색이 도는 돌의 한가운데에 먹 가는 면을 원형 두 개로 매끈하게 파내고, 그 주변을 정교하게 조각한 형태였다. 얼핏 보면 옥 공예품 같다. 세로 40㎝ 남짓한 벼루에 거문고 켜는 사람, 술잔 든 선비, 포도 넝쿨, 십장생, 개구리, 메뚜기 등이 1~2cm 크기로 숨은 그림처럼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극사실주의 예술! 미켈란젤로, 로댕도 흉내 못 내는 신의 경지에 이른 조각입니다.”
시인이 최고로 꼽는 이 벼루 이름은 위원화초석일월연(渭原花艸石日月硯). 15~16세기 조선 초기 평안북도 위원강(북한 행정구역으로 자강도) 유역 돌인 위원석(渭原石)을 해(日)와 달(月) 모양으로 판 벼루다. 그간 모은 일월연 중 60여 점이 전시에 나왔다. 그는 “인사동에서 50년 골동 장사 한 사람들도 이런 벼루를 못 봤다고 한다. 명맥이 끊겼기 때문”이라며 “연구해본 결과,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 도공뿐만 아니라 벼루 장인도 데려간 것 같다”고 했다. 전시엔 다산 정약용이 으뜸으로 꼽았다는 보령의 남포석 벼루 40여 점도 나온다.
소장에 깃든 얘기도 흥미롭다. 그중 하나가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자신의 스승인 대제학 남유용에게 하사한 벼루다. 김종학 화백이 소장했다가 한때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가지고 있었다. 이후 IMF 외환 위기 무렵 경매에 나온 것을 시인이 3000만원에 샀다.
그사이 들인 돈이 엄청날 것 같다고 하자, 시인이 정색했다. “벼루 모을 때 환금성(換金性)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진정한 소장가는 돈을 생각해선 안 됩니다. ‘안목’과 ‘지향성’이 중요하지요. 완물상지(玩物喪志).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본심을 잃어서도 안 되고요.” 그는 초정 김상옥 시인이 백자 한 점을 사서 ‘엠파이어 스테이트하고도 안 바꾼다’면서 당호(堂號·집 이름)를 불역마천시루(不易摩天詩樓·마천루와도 안 바꾸는 곳)라고 지은 일화를 꺼내며 “나도 수십억, 수백억을 준다 해도 벼루하고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시를 일러 “사람의 생각이 우주의 자장을 뚫고 만물의 언어를 캐내는 것”이라고 한 시인이다. 그간 벼루에 관해 쓴 시만 80여 편. “나이가 들어 가뭄이 든 머릿속은/ 어디서 물꼬를 튼다?/ 몇 방울의 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내 연전만 자꾸 말라가고….” 시 ‘여적’에선 글 밭이 자꾸 말라간다고 했지만 엄살 같다.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이 지어준 그의 아호는 ‘사천(沙泉)’. 사막 위의 샘, 즉 오아시스다. 시인에게 벼루가 있는 한, 시상(詩想)의 오아시스는 마르지 않을 듯하다. 전시 문의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