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이 이렇게 예쁜지 이제야 알겠어요.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샘솟는다니까요. 하하.” 마천루 즐비한 뉴욕 맨해튼을 떠나 북촌 한옥에 잠시 둥지 튼 유나 양이 미소지었다. 그는 21년 만에 온 모국에서 영감을 받아 최근 새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이자 유명 패션모델 메이 머스크(73)가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5년 전 ‘메트 갈라(Met gala)’ 때 아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기금 마련을 위해 매년 여는 ‘메트 갈라'는 ‘패션계의 오스카’로 불릴 정도로 패션업계 초미의 관심사다. 당시 60대 후반의 메이는 드레스 대신 점프 슈트(위·아래가 붙은 바지 형태 옷)를 입고 레드 카펫에 올라 20~30대 초특급 셀러브리티를 제치고 보그·뉴욕 타임스 등 유력지를 장식했다. ‘일론 엄마'가 아닌 ‘톱 모델' 메이의 재발견이었다.

이 옷을 디자인한 주인공은 한국계 디자이너 유나 양(43·본명 양정윤). 뉴욕에서 2010년 데뷔해 12년간 하이엔드(최고급) 브랜드를 일궈온 인물이다. 고객 리스트엔 모델 켄달 제너, 배우 대샤 플란코 등 톱스타가 수두룩하다.

이 화제의 디자이너가 요즘 서울살이 중이다. 마천루 가득한 맨해튼에서 벗어나, 비둘기 빛 기와지붕이 옹기종기 어깨 맞댄 북촌의 한옥에 머물고 있는 유나 양을 만났다. 트레이드 마크인 하늘하늘한 드레스 차림을 생각했는데, 웬걸 그녀는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주말판 인터뷰잖아요. 독자분들이 주말 느낌을 느꼈으면 해서요.” 기사가 실리는 요일까지 계산해 TPO(시간·장소·상황을 일컫는 말)를 맞춘 것이다.

유명 실버 모델인 메이 머스크가 최근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2016년 아들 일론 머스크와 메트 갈라 때 함께 한 모습. 파란 색 점프 슈트가 유나 양이 디자인한 의상이다.

◇밀라노·런던·뉴욕 찍고 서울

2000년, 대학(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 후 방황하던 미술학도는 어학 연수차 밀라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혹시 알아? 내가 겐조 같은 유명한 동양계 디자이너가 될지.” 말리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무심코 던진 말이 씨가 된 걸까. 우연히 카페 옆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인생 항로를 바꿨다. 할머니는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장인이었다. 그녀의 공방에 놀러 갔다가 하이엔드 패션에 단숨에 사로잡혀 현지 패션 스쿨 ‘마랑고니’에 입학했다. 이후 런던의 유명 패션학교 센트럴세인트마틴스에서 공부한 뒤, 2010년 ‘YUNA YANG(유나 양)’이라는 브랜드로 뉴욕 패션 위크에 데뷔했다.

-21년 만에 금의환향한 셈인데 어떤가.

“김포공항에서 라면을 가득 채운 이민 가방 두 개를 부치고 친구들하고 인사하던 기억이 난다. 잠깐 다녀오겠다며 갔는데 이렇게 길어지다니! 한국 떠난 뒤 2주 이상 서울에 머문 적이 없는데, 작년 봄 코로나를 피해 왔다가 1년 가까이 있게 됐다. 이참에 한국을 주제로 한 새 컬렉션도 발표하고 책도 냈다.”

-새 컬렉션과 책 제목 모두 ‘피어리스(fearless·두려움 없는)’더라.

“두려움 극복기랄까. 한국 디자이너로서 한국을 주제로 작업하려니 무척 두렵더라. 못하면 망신당할 것도 같고. 그걸 극복하는 데 좀 걸렸다.”

-한국에선 처음 일하는 건데 어떻던가.

“뜻밖에 규제가 많더라. 될 일도 안 되게 하려는 것만 같아 아쉬웠다. 미국은 반대로 안 될 것 같은데 다 된다. 공동 목표가 생기면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또 놀란 점! 왜 계약서에 ‘갑을’이라고 명시하는가. 그 명명 때문에 건강한 파트너 관계가 애초부터 형성되지 않는 것 같다.”

◇성공 비결? “주제 파악 잘해”

-데뷔 첫해부터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패션 바이블'로 통하는 ‘WWD(Women’s Wear Daily)’ 커버를 장식했다. 이십세기폭스사, 조지 루커스 필름과도 협업했다. 성공 비결이 뭔가.

“주제 파악을 잘한다(웃음).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안다. 그거 위주로 하니 실패가 적다.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 일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정작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기 십상이니까. 인생도 그렇다. 하루하루 정신없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늘 생각한다. 하이엔드 패션업계는 성패 기준이 모호하다. 저 브랜드가 누굴 입혔으니 나도 입혀야 한다는 식이다. 자꾸 휘둘리면 인생이 비참해진다. 직원들에게도 ‘doing(하는 것)’보다 ‘thinking(생각하는 것)’을 강조한다.”

유나 양이 디자인한 옷을 입은 전설적 수퍼 모델 캐롤 앨트. /유나 양 제공

-인맥 좋기로 유명하던데.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더니 고객이 지인을 소개해 주면서 인맥이 쌓였다.”

-모범 답안 아닌가.

“사실 데뷔하자마자 주목받는 기대주였다가 2~3년쯤 됐을 때 슬럼프가 왔다. 옷이 너무 안 팔렸다. 직원 한 명이 오빠가 헬스 트레이너인데 영화사 관계자를 가르치고 있다면서 그 사람한테 룩북을 보여주겠다더라. 얼마 후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십세기폭스사 마케팅 담당 부사장이던 줄리아 페리였다.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홍보 의상을 맡아 달라고 했다. 영화 시사회 전날 그녀가 말하더라. 앞으로 평생 롤러코스터 탈 준비가 됐느냐고.”

유나 양이 디자인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홍보 의상. /유나 양 제공

-경력에서 메이 머스크를 뺄 수 없다.

“2016년 메트 갈라를 앞두고 줄리아가 메이에게 나를 추천했다. 메이가 처음 우리 작업실에 왔을 때, 줄리아가 ‘지적인(intelligent) 디자이너’라고 해서 호감이 갔다고 하더라. 패션업계에선 ‘재능 있는(talented)’ ‘멋진(charming)’ 같은 수식을 주로 쓰지 지적이라는 표현은 잘 안 쓴다.”

-굉장한 찬사다. 스스로 지적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식 주입식 교육 덕을 톡톡히 봤다(웃음). 중고등학교 때 세계사, 과학 등 그 많은 과목을 달달 외우지 않나. 그 덕에 외국에서 누굴 만나도 얘깃거리가 있다. 디자인할 때 내 옷이 그 사람 경력에 터닝 포인트가 되게 하려 한다. 그러려면 여러 번 만나 대화하는 게 필수인데, 대화할 밑천이 다양한 것이다.”

-메이가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델 생활 하는 동안 입어본 의상 중 가장 상징적인 룩”이라고 호평했다.

“그 해 갈라 주제가 ‘테크놀로지와 패션의 만남’이었다. 금색, 은색, 비즈 장식 일색이었는데 나는 반대로 갔다. 화려한 것 다 빼고, 중세 남성복에서 유래한 케이프(망토)를 단 점프 슈트를 만들었다. 색상은 승리의 색인 로열 블루. 이혼 후 싱글맘으로 자녀 셋을 훌륭하게 키우면서 모델 경력도 쌓아간 강인한 여성인 메이의 인생에 대한 헌사였다.”

이후 메이는 70세 생일 파티, 자서전 출간 기념 파티에 유나 양을 초대했다. 그는 “메이뿐만 아니라 성공한 이들을 보면 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긴다. 모델계 전설인 캐롤 앨트는 매장에서 입었던 옷을 일일이 걸어주고 나가더라. 결국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야 성공하는 것 같다”고 했다.

몇 년 전 컬렉션 백 스테이지에서 메이 머스크(맨 오른쪽)와 함께. /유나 양 제공

◇‘활자 중독' 디자이너

-책을 많이 읽나?

“활자 중독이다. 베스트셀러는 웬만하면 다 본다. 책을 쓰며 목표는 단 하나였다. 재미없는 책은 쓰지 말자! 이번 컬렉션을 준비할 땐 박완서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손원평 소설 ‘아몬드’ 같은 작품을 읽었다. 한국 작가 글엔 여백이 느껴진다. 그걸 의상에 반영하려고 했다. 백자처럼 담백하게 비워내려고 애썼다.”

이번에 한국에서 작업한 새 컬렉션 '피어리스'. 최대한 장식을 절제했다. /유나 양 제공

-영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나.

“한 백화점 바이어가 나랑 통화하다가 못 알아듣겠다고 하더라. 나는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서툴게 해도 알아듣는데 너는 왜 외국 사람이 하는 서툰 영어를 못 알아듣느냐고 했다. 상대가 웃더라.”

-그런 당당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나.

“어머니가 ‘쿨’하시다. 1호 안티팬이랄까? 이제 알아보는 사람도 있으니 어디 나가면 조심해야겠다고 하면, ‘너 아무도 몰라. 오버하지 마’ 이러신다. 당신이 잘못 키워서 내가 이렇게 기가 세다고 하신다. 하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주제의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유나 양 제공

-일부러 한국 모델을 쓰고, 한국 음악을 쇼에 쓰기도 하던데.

“처음엔 일본, 중국도 아니고 한국 디자이너가 먹히겠느냐며 브랜드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라고 하더라. 한국은 짝퉁 천국이라고 비꼬는 동료도 있었다. 오기가 생겨 더 한국인임을 드러냈다.”

-한국 위상이 그렇게 낮은가.

“2015년 왕가위가 예술 감독을 맡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중국 패션 특별전이 열렸다. 내심 유치하기를 바랐는데, 전시가 정말 훌륭했다. 화장실 규모밖에 안 되는 한국관이 너무 초라해 속상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3~4년 전 한 중국 투자자가 나를 중국 디자이너인 줄 착각해서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세계 4대 패션 도시인 뉴욕에서 중국 디자이너가 성공했으면 좋겠다면서 투자하고 싶다고 하더라. 한국도 멀리 내다보고 우리 디자이너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꿈이 뭔가.

“패션사에 한 획을 긋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 하하! 불가능할 거 안다. 그래도 도전할 거다. 뉴요커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유 네버 노(You never know)! 인생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그녀의 시원시원한 입담에 빠져 땅거미가 내려 앉은 것도 몰랐다. 걸어 다니며 상상하는 걸 좋아해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는 그녀가,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철 3호선 안국역으로 빨려 들어갔다. 퇴근길 지하철 속 사람들이 그녀의 머릿속 스케치북에 어떻게 담길지 자못 궁금해졌다.

패션 디자이너 유나 양.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