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갔다가 파도에 환장하는 커다란 골든래트리버를 봤다. 개는 목줄을 쥔 반려인과 함께였는데, 바다를 처음 본 것 같았다. 물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개는 파도가 밀려갔을 때는 안달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막상 파도가 밀려오면 어쩔 줄 몰라 사람의 다리 사이로 숨었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에 계속해서 찰싹찰싹 씻기는 그 개를 보며 나는 쟤도 ‘솔티독’이구나 생각했다. salty dog.
salty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 일단 ‘소금기가 있는’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예민한’과 ‘재미있는’도 있다. salty dog은 소금 묻은 개이면서 예민한 개이며 재미있는 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그 솔티독을 보면서 솔티라는 단어가 품은 뜻을 이해했다. 소금이 묻으니 예민하기도 하면서 재미있기도 한 것이다. 예민한 것은 개 본인의 입장, 재미있는 것은 개를 보는 사람의 입장. ‘솔티독’으로 쓰기도 한다. 그럴 때의 솔티독은 칵테일 이름이다.
솔티독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후문가에 솔티독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었다. 차를 팔기도 하는 술집이었다. 네 시 정도 가게를 열어 차와 맥주를 같이 팔다가 여섯 시쯤 되면 술집으로 변하는 그런 곳이었다고 기억한다. ‘여섯 시가 되면 우리는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 같은 확고한 영업 방침이 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습니까? 해는 갑자기 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어두워지다 갑자기 반짝 밝아지기도 하다 어두워지니까요.
당시에 솔티독이라는 칵테일을 알았던 건 아니다. 솔티독이라는 이름이 내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이곳의 분위기도. 이런 옥호를 붙인 분이 하시는 곳답게 간판도 작았고, 네온사인도 없었고, 간판에 간신히 불이 들어오는 정도였다. 나는 이 ‘간신히’라는 이곳의 애티튜드에 마음을 뺏겼다. 당시는 너도나도 큰 간판을 달며 가게의 위세를 떠벌이고, 또 너도나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달아 가게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뭐랄까… 간판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저렇게 간신히 불을 밝히고 있는 솔티독 주인장의 기개가 좋았다.
솔티독은 지하에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콘크리트나 금속으로 된 계단이었다면 이렇게 발이 착 달라붙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소금에 전 듯한 나무 계단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면 나무가 이렇게 부드러워지나 싶었고.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가게의 분위기, 특히 술집의 분위기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결판난다는 걸. 간판을 보는 순간과 계단을 오르거나 내리는 중에 말이다. 특히, 나는 좁고 긴 복도에 약한데(그야말로 취약) 거기를 거니는 동안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도파민이 분비됨을 느낀다.
솔티독에 솔티독이라는 메뉴는 없었다. 솔티독은 칵테일바는 아니었다. 몇 가지 병맥주와 몇 가지 양주를 팔았다. 안주는 마른안주 몇 가지. 예고 없이 문을 열지 않아 손님을(주로 나) 애태우게 하는 주인의 기질로 볼 때 ‘그렇게까지 애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인가?’라고 짐작하고 말았다. 나는 그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자발적으로 입장한 사람이므로 쉽게 수긍했다. 술맛 나는 분위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만드는 안주를 못 먹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주인님의 취향을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알 것 같다. 솔티독에 안주가 거의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 조명과 채광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안주는 입으로도 먹지만 눈으로도 먹는 것. 솔티독의 조명은 아주 어둑어둑했다. 고래기름으로 불 밝히던 중세 시대의 밝기랄까. 그런 조명에서 어떤 안주를 내와도 살리기가 어렵다는 걸 주인은 알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거기는 지하에 있는 집답게 창문이 없었다. 창문이 없으면 환기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아무래도 냄새가 고이게 되는데 그런 데서 안주를 만들고 먹어대다가는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닐까?
솔티독을 보았고, 솔티독을 떠올렸으니, 이제 내게 남은 건 단 하나. 솔티독을 마시는 거였다. 이럴 때의 나는 이 소박한 욕망에 저항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티독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솔티독에는 진이나 보드카가 들어가는데 그건 집에 늘 있고, 자몽주스를 사면 됐다.
솔티독은 이렇게 만든다. 잔의 테두리에 소금을 묻힌 후, 진과 자몽주스와 얼음을 붓거나 보드카와 자몽주스와 얼음을 부으면 된다. 진이냐 보드카냐 하는 실존적인 문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보드카보다는 진이니까. 그래서 진을 베이스로 하는 솔티독을 먼저 만들었다. 흠, 진의 쌉쌀한 맛에 자몽의 씁쓸달콤한 맛, 거기에 소금의 결정까지 느껴지니 싫어할 수가 없다. 다음은 보드카를 타서 솔티독을 만들었다. 오! 보드카의 끈적끈적한 물성에 액체화된 자몽의 과육이 사르르 하고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여기에 소금 맛까지 더해지니 이것은… 마시는 순간 ‘나의 칵테일 리스트’의 최고점에 안착했다.
칵테일의 묘미는 바로 이거다. 좋은 것끼리 섞는다고 늘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섞을지라도 놀라운 결과를 보기도 한다는 것. 팀플레이랄까. 운동 신경은 물론 운동에 어떤 흥미도 가져보지 못한 나는 술에 술을 타면서 운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이럴 때, 호나우두니 메시니 하며 적절하게 비유해주면 좋을 텐데 전혀 아는 바 없어 쓸 수 없으니 너무 느낌이 없다. 이러다 솔티독 마시면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술을 섞다 보면 알게 된다. ‘섞는다’라는 감각에 대하여 말이다. 술과 술은 물론 술과 다른 게 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밀도와 냄새가 섞이는,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 말이다. 또 이런 깨달음도. 세상에 나쁜 술은 없구나라는. 나쁜 건 술을 나쁘게 만드는 인간의 무지와 무절제, 내가 너보다 많이 마시겠다는 호승심, 그런 사람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음날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끄러움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다.
보드카를 탄 솔티독을 마시면서 ‘솔티’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영국인들은 ‘솔티’를 재미있다는 뜻으로, 미국인들은 ‘솔티’를 예민하다는 뜻으로 주로 쓴다는데 결국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예민하니까 재미있고, 재미있으니까 예민한 거 아닌가? 예민하다는 건 많은 걸 느낀다는 뜻이므로 재미 또한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재미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면 예민한 것이고. 예민한 사람은 보통 살기 힘드니 이 정도의 재미쯤은 신이 허락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솔티한 사람과 술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