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에서 ‘나라를 보호해주는 신’으로 모시며 제사까지 지냈던 삼각산. 우뚝 솟은 바위가 불의 기운을 뿜어낸다. /문화재청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이 읊었던 시조다.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로 구성된 삼각산은 조선의 상징이었다. 흔히 백두산을 한민족의 진산(鎭山)으로 보지만 그렇지 않다. 세종 이전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고, 이후로도 여진족과 청나라가 더 성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진산이었다. 지금은 북한의 진산일 뿐이다.

“만주 땅을 삶터로 삼았던 고조선의 우리 조상들에게는 백두산보다 의무려산(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이 진정한 진산이었다.”(윤명철 동국대 명예 교수) 진산은 나라 혹은 고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일 뿐만 아니라, 영험한 땅기운은 그 땅의 사람들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산이 사람을 키워준다(山主人)’는 풍수 격언이나 인걸지령이란 말도 이와 같은 관념에서 나왔다.

지금 우리의 실질적 진산은 어디일까?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은 백두산보다 삼각산을 더 중시하여 “첫째가 삼각산, 둘째가 백두산”이라고 하였다. 삼각산은 조선 건국 직후 “나라를 보호해주는 신(호국백·護國伯)”이란 작위와 제사를 받았다. 조선 왕조가 삼각산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는 그 경계 표시에서 잘 나타난다. 대부분의 행정구역은 산 능선이나 물의 한가운데 이쪽저쪽으로 경계 짓는다. 그런데 삼각산은 이러한 원칙에 따르지 않고 만경대·백운대·인수봉을 중심에 넣고 주변의 작은 산과 천을 포함했다. 그들로 하여금 삼각산을 호위케 함이었다. 1861년 김정호가 그린 ‘청구전도’에는 삼각산이 마치 사람 머리처럼 표시된다.

이러한 삼각산 지위는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이 훼손한다. 일제는 ‘한성’을 ‘경성’으로 바꾼다. ‘한성’이 국가의 도읍지(국도·國都) 자격이었다면, ‘경성’은 경기도 관할이었다. ‘조선 지우기’였다. 경희궁 철거(1910),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1911), 황제국을 상징하던 환구단 철거(1913),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건립(1926), 종묘와 창덕궁 사이 지맥 자르기(현재의 율곡로) 등도 대표적 사례다. 지금의 서울 강북구와 경기 고양시에 걸친 삼각산도 국도인 한성 땅이 아닌 경기도 땅으로 축소·격하된다.

왜 조선은 삼각산을 그렇게 중시했을까? “인수·백운·만경 세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은 모양이 세 뿔과 같다”는 삼각산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리고 있는(용반호거·龍盤虎踞) 형세”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용반호거의 땅에서 제왕이 나온다(제왕지지·帝王之地)”고 촉나라 승상으로 풍수에 능했던 제갈량은 말했다. 쪼개진 바위가 아니라 거대한 암괴 그 자체다. 바위는 강력한 권력의 기운을 준다.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던 조선 왕조를 지켜 줄 진산으로 손색이 없었다. 반면 조선을 멸망시킨 일제로서는 삼각산 지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격하해 모욕을 주어야 했다. 일종의 ‘풍수 침략’이다.

삼각산은 맑고 밝아 멀리까지 그 양명한 기운을 발산한다. 화산(華山·화려한 산)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다. 바위로만 된 산이다 보니 수기(水氣)가 부족한 반면 화기(火氣)가 강하다. 불꽃처럼 위로 치솟는 산이다. 불[火]은 타오르면서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해준다. ‘주역’에서 불을 문화·문명으로 상징하는 이유다. 세계를 휩쓰는 K컬처가 서울을 중심으로 떨쳐 일어난 것도 삼각산 정기 덕분이다. 지금 우리에게 삼각산이 더 중요한 이유다.

일제가 격하한 삼각산 지위는 아직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서울시 땅이 아닌 경기도 땅이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필자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전까지, 필자 역시 삼각산을 행정구역상 서울시 땅으로 알고 있었다. 서울(그리고 대한민국)의 진산으로서 삼각산의 조속한 ‘복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