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 대륙의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들이 사는 북방과 맞닿아 있기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서 방어한다. 그 장벽을 지키는 것은 죄수로 이루어진 밤의 경비대. 그것을 운영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윈터펠의 영주가 할 일이다. 원래 죄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므로 탈영자는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에다드 스타크는 옛 법도를 지킨다. 탈영병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본인이 직접 칼을 빼들고 목을 친다. 고귀한 영주가 왜 이런 잔인한 망나니짓을 해야 하는 걸까? 에다드는 아들 브랜에게 설명한다. “우리는 선고를 내리는 자가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그 눈을 똑바로 보고 마지막 말을 듣는 정도는 해야 해. 그것도 견디지 못할 거면, 그 누군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미국의 작가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왕좌의 게임’의 도입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미국 HBO 드라마의 원작이기도 하다. 칼과 갑옷과 마법이 등장하고 드래건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세계관, 그들의 가치와 지향점 등에서 진지한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사형수를 직접 처형하는 이 대목을 통해 우리는 칸트 윤리철학 중 자유와 책임, 그리고 존엄이라는 가치를 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처형하면서 존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심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사형수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범죄자는 자신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법을 어긴 자’인 범죄자를 처벌할 때, 역설적이게도 사회는 그 범죄자의 자유로운 인격과 존엄을 존중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붙잡힌 안중근 의사가 ‘나를 전범으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안중근은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 의도적이었다. 처벌당할 것을 알았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실행에 옮겼다. 우발적 충동이 아닌 본인의 신념에 따른 행동임을 일본의 법정에서 당당히 외쳤다. 안중근의 이 존엄한 태도 앞에 일본인들 역시 진심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는 존재다.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자유와 책임은 하나다. 칸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응보주의’로 분류되어 비판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원인은 다양하므로 철학적 원리를 곧이곧대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한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라는 사고방식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옳다.

자유롭지 않다면 책임질 수도 없다. 책임이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지배를 받는 사람, 혹은 법을 어기고 처벌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 역시 스스로의 판단과 행위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에다드 스타크의 말은 그런 의미다.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사람의 목숨을 끊는 그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의 부담까지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치자의 자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만들어내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 풍경은 이와 사뭇 다르다. 법무장관은 인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며 검찰총장의 수족을 잘라내고,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퇴임 후 정치 활동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둘을 임명한 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개입하지도 중재하지도 않고 그저 방관하는 중이다.

이와 같은 행보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하며 그에 따라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는 영주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으며, 적절하게 조율해낼 수 없다면, 둘 중 한 사람을 해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재인 본인이 인사권자라면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궤적을 놓고 볼 때 문 대통령이 칼을 빼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기어이 임명했던 검찰총장이 바로 윤석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윤석열을 임명해놓고 자기 손으로 해임한다면, 검찰을 정권 보위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직접 자르지는 못하고 스스로 나갈 때까지 괴롭힌다. 마치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들개를 풀어놓는 장면을 연상케 할 지경이다.

게다가 윤석열의 말에 따르면 문재인은 지난 총선 이후 윤석열에게 자리를 지켜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렇다면 지금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치를 일부러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권에는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는 대신 문제를 방치하거나 부풀리는 이 아수라장은 과연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왕좌의 게임’으로 돌아가보자. 윤리적인 영주 에다드 스타크는 음모에 휩쓸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다. 평화로웠던 대륙은 일곱 가문이 뒤엉킨 전쟁에 휘말리고 동쪽의 대륙으로 망명을 간 구 왕가의 후손은 신비한 힘을 얻어 재기를 도모한다. 선한 자는 쓰러지고 악한 자들이 날뛰는 가운데 윈터펠의 후손들은 가문에 내려오는 좌우명을 되뇌며 각오를 다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

드라마와 달리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상 매체에서 온전하게 다루기 힘든 철학적 고민과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이는 걸작이다.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질 때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가 된다. 이는 사형수부터 영주까지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끝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그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머잖아 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