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2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뉴스1

안전운임제(화물차주의 최저운임을 보장하는 제도) 영구 시행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총 소속 화물연대와 정부가 28일 첫 협상에 나섰지만 결렬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29일 국무회의를 열고 ‘벌크 시멘트 트레일러(BCT)’ 운송사업주와 운수종사자(차주)에 대해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할 방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8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노(勞) 측의 불법행위든, 사(社) 측 불법행위든 법과 원칙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며 불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어 “국민경제를 볼모로 한 노조의 불법과 폭력은 경제를 망가뜨리고 국민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진다”면서 “결국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시달리는 저임금 근로자”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29일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일단 공장으로 시멘트를 운반하는 BCT 운송사업자와 차주에게 업무 복귀를 강제하는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할 것으로 전해졌다. 전국의 BCT 차량은 3000여 대로 전체 화물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5% 정도에 불과하지만, BCT 중 화물연대 소속이 70~8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화물연대 장악력이 높아 경제에 피해를 주고 있는 분야 중 차량 대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부담이 크지 않은 부분부터 업무개시명령을 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업무개시명령이 발동되면 오는 30일과 내달 1일 이틀간 차주 등에 대한 통지에 들어갈 전망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 파업 5일째인 28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에서 열린 정부와 화물연대의 1차 협상모습./신현종 기자

화물연대 파업 닷새째인 28일 정부와 화물연대는 첫 협상을 벌였지만 절충점을 찾지 못했다.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 영구 보장을, 정부는 ‘3년 한시 연장’ 등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고 헤어졌다. 오는 30일 두 번째 협상을 하기로 했지만 양측 모두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정부는 28일 이번 화물연대 총파업의 위기 단계를 ‘경계’에서 최고 등급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대통령실을 정점으로 전 부처가 함께 대응하겠다는 뜻이다. 이어 29일엔 예정대로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한다는 방침이다. 화물연대는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해도 파업은 계속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갈등은 격화할 전망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총파업 닷새째인 28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주유소 앞 입간판에 ‘휘발유 품절’이라고 쓰인 안내문이 붙어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으로 주유소에 기름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기름 대란’이 본격화하고 있다. /뉴시스

이날 경찰에 따르면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폭행, 업무방해, 특수상해 및 재물손괴 등 혐의로 총 8건 12명을 수사 중이다. 화물연대 시위는 점차 거칠어지고 있다. 전국에서 매일 동시다발적으로 ‘운송 방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26일 오전 7시쯤 부산신항에서 정상 운행 중인 트레일러 2대에 쇠구슬을 투척해 피해자 차량 전면의 유리를 파손시키고 피해자 목 부위에 상해를 입혔다. 경찰은 발견한 쇠구슬 2개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정밀 감식을 의뢰한 상태다.

25일 전남 광양에선 화물연대 조합원 3명이 운행 중인 비(非)조합원 화물차량을 뒤쫓아가 갓길에 차를 세우게 한 뒤 차주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욕설을 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남 창원시에선 화물연대 소속의 한 20대 조합원이 지난 25일 오후 운행 중이던 50대 비조합원의 차량에 계란 2개를 투척했다가 검찰에 검거됐다. 이 조합원은 경찰에서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비조합원들이) 혼자 돈을 버는 것에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지난 25일 경북 포항시에선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대송IC 인근 도로를 운행 중이던 비조합원 차량 앞을 가로막은 뒤 운전자에게 욕설을 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총파업 닷새째인 28일 오후 서울 시내 주유소에 휘발유 품절로 차량들이 다시 나가고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이 길어지면서 주유소에 기름 수송 차량이 오지 않는 등 '기름 대란'이 본격화되고 있다./뉴시스

산업계에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시멘트 업계다. 전국의 시멘트 운송 차량은 3000대 정도다. 이 중 화물연대 소속은 70~80%(2100~2400대)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전체 화물차(44만대)의 0.5%에 불과하지만, 높은 장악력을 바탕으로 시멘트·레미콘 업계는 물론 건설업계 전반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레미콘 업체 등의 시멘트 비축량도 3~4일치 정도로 적은 편이어서 운송 거부 타격은 더 크다.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는 이날 전국 945개 레미콘 공장 대부분이 조업을 중단했고, 하루 손실액이 617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배조웅 레미콘조합연합회장은 “레미콘 공장의 80%는 소상공인이 운영하고 있다”며 “조업 중단이 길어지면 소상공인 줄도산과 산업 생태계 붕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레미콘 원재료를 제공하는 시멘트업계도 파업으로 인해 나흘간 464억원의 누적 피해가 발생했다. 업계 관계자는 “공장 내 저장소에 시멘트 재고가 쌓이고 있다”며 “조만간 감산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화물연대 총파업 닷새째인 28일 오후 경기도 안양시의 한 레미콘 업체에 레미콘 차량이 멈춰 서있다. /연합뉴스

시멘트·레미콘 공급이 막히면서 27일까지 삼성·현대 등 8개 대형 건설사의 공사 현장 459곳 중 259곳(56%)에서 콘크리트 타설 공사가 중단됐다. 지난 25일부터 골조 공사가 중단된 1만2000여 가구 규모의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시공사 관계자는 “당장은 레미콘을 안 쓰는 다른 공정을 하면서 버티고 있지만 파업이 일주일만 더 길어지면 전체 현장이 멈춰 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설 현장 ‘올스톱’ 상황이 장기화하면 일용직을 포함한 수많은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고, 내수 경기에 심각한 타격이 미칠 것”이라며 “현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도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대한건설협회와 한국시멘트협회 등 건설·자재업계 5대 단체는 이날 “화물연대 파업으로 건설·자재업계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일선 주유소들의 재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4대 정유사 차량 중 70~80%가 화물연대에 가입돼 있다. 정부 관계자는 “운송 거부가 계속되면 향후 일주일 내에 전국 주유소 절반은 재고가 소진될 것”이라고 했다. 컨테이너 반출입량은 평시의 2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철강은 27일 기준 하루 평균 출하량(4.6만t)의 47.8%(2.2만t)만 출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