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급식실을 바꾸자.” 얼마 전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앞에 이런 추모 현수막이 걸렸다. 강원도 철원군에서 1999년부터 20여 년간 초·중·고교 학생들 급식을 책임졌던 조리사 허모(58)씨를 기리는 것이다. 허씨는 작년 5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수십 년간 급식실에서 마신 ‘요리 매연’ 말고는 원인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암 선고 일주일 후 고용노동부에 산재(産災) 신청을 했고, 그해 11월 인정받았다. 그러나 허씨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지난달 말 눈을 감았다. ‘요리 매연’으로 산재가 인정된 세 번째 급식 노동자다. 앞서 2명이 폐암으로 숨진 상태에서 산재가 인정된 바 있다.

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조리 도중 발생하는 ‘요리 매연’은 작년 2월 처음 학교 급식 종사자 폐암 발병 원인으로 인정됐다. 이후 지금까지 64명이 산재 신청을 했고, 이 중 34명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25명은 심사 중이고, 5명은 인정받지 못했다. 고용부가 ‘요리 매연’ 산재 인정 범위를 혈액암·대장암 등 다른 암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신청·인정 건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굽거나 튀기는 요리를 할 때 발생하는 초미세 먼지(PM2.5)는 ‘요리 매연’ 원인이며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근로복지공단은 기름을 고온으로 끓일 때 산화하며 나온 발암성 물질이 연기와 섞여 ‘요리 매연’을 만들고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여기에 장기간 노출된 사실을 토대로 산재를 인정했다. 특히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주목했다. 안전보건공단이 작년 11월 전국 10개 학교를 골라 조리실 환기장치 실태 조사를 벌인 결과, 8곳에서 후드(hood·공기배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리사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환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차단 효과가 미미했다는 분석이다.

해외에서도 요리 매연을 심각한 초미세 먼지 발생원으로 여긴다. 미국 대기오염 국책연구기관인 CE-CERT연구소에 따르면, 햄버거 패티 1장을 구울 때 발생하는 초미세 먼지는 대형 덤프트럭이 230㎞를 달리면서 내뿜는 양과 비슷했다. 그나마 덤프트럭 매연은 공기 중으로 퍼져 농도가 옅어지지만, 요리 매연은 좁은 공간에서 코로 직접 들어가기 때문에 건강에 더 해롭다는 지적이다. 미 뉴욕시는 작년부터 주당 400kg 이상을 조리하는 대형 레스토랑을 새로 열 때 ‘요리 매연’ 제어 장치를 달지 않으면 영업 허가를 내주지 않는 법안을 도입했다. LA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같은 내용 법안을 통과시켜 시행을 앞두고 있다.

가정에서 요리하는 것도 안심할 수 없다.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2017년 발생한 국내 여성 폐암 환자 8328명 중 90%가 비흡연자였다. 전문가들은 ‘요리 매연’을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임종한 인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엔 발암성 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다”며 “가사를 책임지며 오랜 기간 요리를 해온 중장년층 여성이나, 밀폐된 공간에서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일한 급식 노동자들에게 폐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요리 매연’이 산재로 인정된 작년 이후 각 부처에서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노동부는 ‘학교 급식실 환기시설 가이드라인’과 학교 급식실에서 10년 이상 일했거나 55세 이상인 사람을 대상으로 폐 CT 검사를 실시하도록 기준을 마련, 올해 중 시행하도록 교육 당국에 권고했지만 코로나 여파 등을 이유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환경부도 내년 예산에 20억원을 편성, 학교·구내식당 등 150㎡ 이상 집단급식소 100곳을 대상으로 오염물질 저감 장치를 설치하는 시범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아직 재정 당국과 협의가 되지 않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