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정착지인 ‘아바이마을’이 있는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일대. 속초항의 내항인 청초호수 왼쪽 아래에 있는 육지 섬이 아바이마을이다. 아바이마을 주민들이 속초시내를 가기 위해 애용하는 갯배가 저 멀리 보인다. /고운호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2시쯤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속초 시내와 아바이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폭 50m 물길을 따라 20여 명의 관광객을 태운 갯배 2대가 쉼 없이 오가고 있었다. 양 끝 선착장에 연결된 쇠줄에 갈고리를 걸고 끌자 배는 물 위를 미끄러졌다. 관광객들은 배가 흔들릴 때마다 불안해하면서도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대구에서 온 남모(43)씨는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갯배는 옛 모습 그대로다. 고깃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게 인상적”이라고 했다.

마을에 내리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골목길을 따라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 등을 파는 음식점 10여 곳이 길게 늘어섰다. 음식점들은 저마다 ‘흥남’ ‘북청’ 등 북한 지명을 내걸고 아바이순대 원조를 자처했다. 이 마을 주민은 100여 명. 대부분 6·25전쟁 때 피란 온 실향민의 2~3세들이다. 음식점 골목 뒤편 주택가는 성인 남자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만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실향민 2세 이미숙(60)씨는 “피란민들이 좁은 땅에 터를 잡다 보니 벽을 서로 맞대고 집을 지었다”고 했다.

강원도 속초시는 피란민들이 세운 도시나 다름없다. 그 시작이 아바이마을이다. 통일되면 고향 북쪽에 가겠다며 가장 가까운 이곳에 모여 정착했다. 무인도 바닷가 모래사장에 임시 거처를 만든 것이 마을이 됐다. 같은 고향 출신들끼리 신포마을, 정평마을, 앵고치마을 등 집단촌을 이뤘다. 갯배는 이곳 주민들이 속초 시내로 가깝게 다니기 위한 교통수단이었다.

양양군의 한 마을이던 속초가 1963년 시(市)로 승격한 뒤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이 60년 동안 속초는 ‘실향민 문화’를 테마로 강원도 최고의 관광 도시로 우뚝 섰다. 지난해 1년 동안 속초시에는 관광객 1943만6783명이 다녀갔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속초시 인구 8만2685명의 235배에 이른다. 코로나 여파로 발길이 끊긴 2020년과 2021년에도 1233만1586명, 1312만9416명이 찾았다.

1954년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아바이마을. /속초시

속초 관광의 핵심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정서와 애환. 고향을 그리며 먹던 아바이순대와 함흥냉면, 가자미식해는 속초의 대표 먹을거리가 됐다. 함경도 전통 놀이인 ‘북청사자놀음’도 ‘속초사자놀이’로 전승돼, 작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엄경선 향토사연구사는 “1963년 속초가 시로 승격할 당시 속초 인구는 5만5619명이었는데 절반가량이 실향민이었다”면서 “속초에는 그만큼 실향민의 문화와 정서가 뿌리 깊게 반영돼 있다”고 했다.

2016년부터 실향민 문화를 보존·전승하기 위해 매년 열리는 ‘실향민문화축제’는 대표 관광 상품이다. 2021년 9만3000명이, 작년엔 10만명이 다녀갔다. 축제에선 피란 행렬 퍼포먼스와 고인(故人)이 된 실향민 위령제도 열린다. 오는 6월 열리는 축제에서는 처음으로 ‘탈북민 예술단’을 초청했다. 속초시 관계자는 “생이별의 아픔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자는 취지에서 탈북민들도 축제에 초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 승격 60주년을 기념해 ‘갯배’를 주제로 한 뮤지컬도 첫선을 보인다.

속초시는 올해부터 6억5000만원을 들여 순대와 냉면, 만두 등 북한 전통 음식을 ‘밀키트’로 만들어 전국의 실향민들에게 ‘고향의 맛’을 선물하겠다는 계획이다. 또 알려지지 않은 속초 실향민의 사연과 생활상을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 자료 조사 등에 대한 연구 용역도 추진 중이다.

지난해에는 39억원을 들여 청호동 일원에 실향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아바이 벽화 골목’을 조성했다.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는 좁은 골목길 주택 담벼락에 실향민들 사연이 담긴 시와 그림을 그려 넣었다. 물 건너 아바이마을과 속초 시내를 벽화 골목으로 이어, ‘도보 관광’으로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오는 2025년에는 아바이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속초항 북방파제 위에 낭만 포차 거리를 조성한다. 4000㎡ 부지에 포장마차 30개를 유치해 야경을 보며,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먹을거리를 즐기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속초시 관계자는 “동해안의 ‘여수 밤바다’의 낭만 포차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병선 속초시장은 “과거 실향민들의 아픔이 서린 도시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이야기가 관광 상품이 돼 속초를 일으켜 세웠다”면서 “2027년 동서고속화철도가 완공되면 서울과 속초 간 이동 시간이 1시간대로 줄어 속초가 최고의 관광 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