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8848m)를 정복하려는 욕심은 죽음을 불러요. 마음을 비워야 등정(登頂)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 남체바자르(3440m)에서 최근 만난 칸챠 셰르파(92)는 “에베레스트는 신의 영역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지라 가장 겸손한 자세로 나서야 등정 기회를 준다”고 했다. 또 “히말라야를 경외하는 사람만이 최고봉에서 숨 쉴 수 있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며 “이는 히말라야 여신(女神)의 배려”라고 했다.

칸챠 셰르파는 "매일 에베레스트를 향해 걷는 산악인들을 보면서 에너지를 얻는다"며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인 인생의 터전 덕에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었다. 칸챠 세르파는 1953년 힐러리 경과 에베레스트 초등에 성공한 원정팀 일원으로 유일한 생존자이다. /정병선 기자

칸챠 셰르파는 네팔의 살아있는 산악 영웅이다. 1953년 뉴질랜드인으로 영국 등반대를 이끈 에드먼드 힐러리(2008년 사망)경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을 때 막후 역할을 한 셰르파(길잡이)였다. 당시 힐러리경과 나섰던 등정팀 35명 중 현재 살아있는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을 앞둔 최후의 캠프(8500m)에서 힐러리경과 동료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86년 사망)의 등정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등정 사실을 가장 먼저 세상에 전했다.

에베레스트를 향한 전진기지이자 콩대리(6187m) 등 6000m를 넘는 산군에 둘러싸인 남체바자르 언덕 그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올해 에베레스트 초등(初登) 70주년을 맞은 그는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그는 “당시 제대로 된 등반 장비 하나 없이 야크 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옷만 입고 에베레스트를 올랐다”며 “힐러리경이 쿰부에서 아이스폴(빙폭)을 지나 폭이 넓은 크레바스를 발견했다. 가지고 간 사다리가 짧아 도전히 건널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동료와 다시 마을로 내려가 스무 그루의 나무를 베어 들고 가 다리를 놓고 건너갔다”고 회고했다.

칸챠 셰르파는 남체의 원주민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1900년대 초 티베트 쪽에서 건너온 남체의 첫 거주자였다. 당시 이곳 주민들은 버섯과 감자로 연명했다. 칸챠 셰르파는 생필품 마련을 위해 야크를 끌고 티베트를 오가며 소금과 옥수수를 실어 날라야 했다.

힐러리경이 이끄는 등반대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힐러리와 등반하기 전 에베레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것조차 몰랐다고 했다. 그저 ‘산신(山神)의 어머니’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칸챠 셰르파는 힐러리경의 등반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방풍 옷도 처음 봤고 등산화 등 등반 장비를 처음 봤다고 했다. 또 힐러리경의 첫 이미지는 온화하고 눈이 참 맑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힐러리경은 나를 ‘터프가이이자 유쾌한 친구’라고 불렀다”고 했다.

칸챠 셰르파는 “에베레스트 첫 등정은 네팔과 셰르파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며 “누구나 텐징과 힐러리가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것을 알지만, 원정대 전체가 당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또 “1950년대 유럽인들은 산행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면, 셰르파들은 산에 대한 경외심에서 정상에 오르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던 때”라고 했다.

칸챠 셰르파는 자신은 당시 에베레스트 정상 직전에서 내려왔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에베레스트 등정에 6차례 나섰지만, 정상에 오르는 대신 조력자 역할만 했다고 했다. 지금은 조력자에 그쳤던 셰르파들이 등정하는 시대고 네팔 산악인들도 어느 나라 산악인 못지않게 8000m 봉 등정에 나서고 있지만, 평생 여느 셰르파처럼 등정이나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에베레스트 초등 때 열악한 환경으로 셰르파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금까지 300여 명의 셰르파의 주검을 접했다. 1970년 눈사태로 셰르파들이 속절없이 죽은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고산 등반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마나슬루, 마칼루, 안나푸르나 등 8000m급 고봉 베이스캠프를 주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등반을 돕는 일을 해왔다. 또 힐러리경의 영향을 받아 ‘히말라얀 트러스트 재단’을 만들어 셰르파의 교육·복지 사업에 나섰다.

그는 한국의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힐러리경 이후 가장 활발히 네팔 교육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전했다. 엄 대장은 에베레스트 길목 팡보체에 첫 학교를 지어 기증한 데 이어 남체바자르에 유일한 병원을 지어 기증했다. 칸챠 셰르파는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 등정 후 이곳에 학교와 다리 등 다방면의 지원 사업을 했는데 그를 이어 지금은 엄 대장이 가장 활발히 네팔의 교육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연신 감사했다.

칸챠 셰르파의 집은 에베레스트로 가는 산악인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언덕에 있다. 그는 “매일 에베레스트를 향해 걷는 산악인들을 보면서 에너지를 얻는다”며 “이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인 인생의 터전 덕에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