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방한한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 /연합

“코로나 사태로 인해 독자들의 선택 폭이 확 줄었습니다. 이전엔 10만권 중 한 권 선택했다면 지금은 유명 작가 작품 100권 중 하나를 고르는 식이 됐지요. 나는 그 덕을 봤지만 미디어가 조명하는 몇몇 책만 관심 받는 건 안타깝습니다.”

2일 방한한 공쿠르상 수상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65·프랑스)가 팬데믹으로 인한 문학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영국의 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 그는 2020년 수상자다.

/민음사 제공

서울국제도서전 참석과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L’Anomalie)’ 한국판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그는 팬데믹 이후 한국에 온 첫 해외 작가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서울 광화문의 간담회 장소로 왔지만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질문보다 몇 곱절 긴 답을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문학상 수상작은 고루? 대중성·예술성 잡아 110만부 히트

책 제목 ‘아노말리(L’Anomalie)’는 ‘이상(異常)’ ‘변칙’이라는 뜻. 주로 기상학이나 데이터 과학에서 ‘이상 현상’ ‘차이 값’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책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통상 11월 초 공쿠르상 수상자가 발표되지만 그해는 한 달 늦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영업 금지령이 내려진 서점과 연대한다는 의미였다. 봉쇄령이 해제된 날, 그가 수상자로 발표됐다. “3년 전 집필을 끝내고 제목을 붙였을 때 출판사에서 반대했어요. 제가 고집해 밀어붙였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갑자기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맞닿아 공명하는 멋진 제목이 돼버렸지 뭐예요(웃음).”

소설은 복사기로 스캔한 듯 파리·뉴욕 간 여객기가 석 달의 시간 차를 두고 똑같은 사람을 싣고 같은 곳에서 난기류를 겪은 사건을 그린다. 청부 살인 업자, 건축가, 소설가, 가수 등 각기 다른 직업을 지닌 8명의 등장인물이 3개월 전의 나와 대면한다는 내용.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프랑스에서 110여 만부가 팔렸다. 공쿠르상 수상작 평균 판매량(30만~40만부)을 훌쩍 넘긴 수치다.

'아노말리' /민음사

◇3개월 전의 나를 대면한다면?

인간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택한 것은 ‘분신(分身)’이다. 작가는 “그리스 신화부터 현대 문학까지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분신의 유형을 네 가지로 연구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들어가 ‘사칭’하는 법, ‘지킬 앤드 하이드’처럼 적(敵)이 되어 천사와 악마의 공존을 보여주는 방식, 거울에 비춘 듯 보여주는 ‘거울상’, 진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법이었다. 그 중 가장 마지막 방식을 취했다.

“인생에 갈림길도 있고, 급류를 타는 순간도 있지만 지나면 물리적으로 되돌릴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바꿀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 대상이 자신이라도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질문해 봤습니다. 내 의지로 결정한 삶의 양태(樣態), 가치관, 내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결론을 얻게 됐습니다.”

3개월의 간극을 둔 것은 “물리적으로 겉모습 변화는 크지 않지만 본질적 변화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그가 석 달 전 자신을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길 가다가 다른 사람이 나를 밀어도 내가 먼저 사과하는 스타일이랍니다. 또 다른 나를 대면한다면 대립하기보단 대화하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할 것 같군요.”

2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에르베 르 텔리에. /민음사 제공

◇수학자·과학자 넘나드는 르네상스맨

르 텔리에는 수학자, 과학 기자, 언어학자, 비평가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르네상스인이다. 문학과 수학의 공통점은 뭘까. “언어학자들이 모국어를 정의할 때 ‘원활하게 숫자를 셀 수 있는 언어’라고들 합니다. 그만큼 언어와 숫자, 문학과 수학은 관련이 깊습니다.”

조르주 페렉, 마르셀 뒤샹 등이 참여했던 실험적 문학 창작집단 ‘울리포’ 회원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엔 표면적인 실험은 없으나 내재한 실험이 있다. 등장인물 특성에 맞춰 장마다 장르와 문체를 달리해 다양한 문학 코드를 한 책 안에 모았다. 예컨대 청부 살인 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나이 차 많은 건축가 커플을 묘사할 땐 로맨스 형식을 따랐다. 작가는 “자칫 독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봐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클리프행어(cliff hanger·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기법)를 넣어 뒷이야기가 궁금하게끔 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부산행’, 인간 군상 보여준 수작

SF적 상상력과 유머로 코팅한 풍자가 텍스트 가득 배어 있다. 전대미문 사건이 발생하자 과학자·수학자 등 각계 전문가를 그러모아 허둥지둥하는 백악관의 모습은, 애덤 매케이 영화 ‘돈 룩 업’을 떠올린다. 사건의 전말이 가상현실과 연관돼 있다는 측면에선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와도 닮았다. “나는 항상 대중적인 소설을 쓰기를 원했고, 이번 책은 조금 더 대중적이기를 원했습니다.”

방한은 처음이다. “과학 기자로서 한국 산업의 고속 성장 정도만 알 뿐 한국 문화엔 문외한”이라면서도 한국 영화 칭송은 잊지 않았다. “봉쇄 기간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한국 영상물을 봤는데 정말 수준이 높더군요. 특히 좀비를 통해 인간 군상을 보여준 ‘부산행’은 수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