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은 빛이 파동인가 입자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림 정중앙에 물결 모양 파동을 그리고 파동 중간에 노란색 입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자신의 연구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소재로 그린 유화를 들고 선 김한기 교수. /박상훈 기자

김한기(46)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지난 13일 수원캠퍼스 자신의 연구실에 걸린 그림 한 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등재 논문만 300편을 보유한 15년 차 반도체 공학자다. 안식년 한 번 없이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지난해 11월 갑자기 붓을 잡았다. 그리고 1년 동안 3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워커홀릭’ 김 교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 때문이다. 연구와 달리 자녀 교육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시교육청 과학영재원을 다니던 아이가 우울증에 학업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그 역시 흔들렸다. 그래서 무작정 화실에 등록했다. “그림에서 위안을 찾고 싶었습니다. 붓을 잡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거든요.”

그는 과학자답게 ‘아는 내용’만 그렸다. 뇌의 뉴런(신경세포)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모습, ‘광합성 원리' 등을 화폭에 담았다. “과학을 그리는 화가가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비전공자라 부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전공만큼은 정확히 알았고, 그걸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과학 논문을 쓰다 보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중간중간 그림을 넣는다”면서 “대중에게 ‘양자역학’, ‘AI’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논문용 그림 한 편을 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예술에 몰두하다 보니 더 이상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행복을 찾게 됐다”고 했다. 아들은 영재원을 그만두고 레슬링을 시작했다. “지난달 아들이 대통령기 전국 시도대항 대회에서 동상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행복해하는 걸 보니 답을 찾은 느낌입니다.”

그는 “한 달에 한 점씩 꾸준히 그리는 게 목표”라고 했다. 지난 17일 경기 용인시 한국미술관에서 그의 첫 전시회가 시작됐다. “과학과 예술의 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과학의 원리와 적용 방식을 예술 분야로 옮겨와 풍부한 표현물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