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으로 춥고 배고픈 세상을 살았습니다.”

19일 서울 코리아나호텔 글로리아홀에서 열린 제27회 방일영국악상 시상식. 수상자인 송순섭(84·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 명창이 답사를 하다가 울컥 목이 메었다. 그는 “젊어서 부산에서 허리끈 졸라매고 살 때 방일영 회장님이 부산에 오시면 꼭 나를 불러 밥을 사주시면서 가실 땐 봉투를 쥐여 주셨다”고 했다. “그때 돈으로 50만원이었습니다. 세상의 부자가 안 부러웠습니다. 참으로 옛날 옛날 배고플 때 도와주신 은혜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부디 왕생극락하소서.” 진심을 눌러 담은 기원에 박수가 쏟아졌다.

제27회 방일영국악상 시상식에서 판소리 ‘적벽가’ 중 새타령을 부르고 있는 송순섭 명창. 정정한 소리를 내뿜은 그는 “소리꾼은 무대에서 죽는 게 운명이고 최고의 영광”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방일영국악상은 국악 전승과 보급에 공헌한 명인·명창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이다. 제자들이 선물한 꽃목걸이를 하고 비로소 환하게 웃은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옹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힘들다고 남의 것을 넘겨다본 적도 없으며,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며 “귀하고 소중한 상을 받노라니 이제야 비로소 ‘내 삶이 제대로 인정받게 됐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스승(박봉술 명창)의 은혜를 기리며, 서슬 깊은 소리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193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드물게 동편제 ‘적벽가’를 전승한 송 명창은 전주 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쉰여덟에 하고, 66세에 인간문화재가 된 ‘늦게 터진 소리꾼’이다. 2006년 ‘삼국지’ 적벽대전의 실제 무대인 중국 장강 적벽대전 터에서 “이놈 조조야, 게 있거라” 하고 호탕하게 노래해 참관하던 현지인들 넋을 잃게 했다. 매섭게 자신을 채찍질해 78세에 장장 네 시간짜리 적벽가를 완창한 자기 관리의 달인이다.

정병헌 전 숙명여대 교수는 축사에서 “선생은 스스로 선택한 판소리와의 만남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태생적 약점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진면목을 보여줬다”고 했다. 한명희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장은 “판소리 ‘적벽가’에서도 특히 적벽대전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전쟁터 상황을 소리로 그려내야 하기에 웬만한 내공으론 불러내기 어렵다. 남창(男唱)이 제맛이고 웅혼 장대한 동편제 목이 제격인데, 송 명창이 바로 적격 인물”이라고 했다.

스타 소리꾼 이자람이 송 명창의 애제자다. 축하 공연 또한 이씨를 비롯해 국립창극단원 이소연과 소리꾼 류가양, 고선화, 노민아 등 송 명창의 쟁쟁한 제자들이 함께 꾸몄다. 판소리 ‘적벽가’ 중에서도 애창되는 대목인 ‘새타령’이었다. “제가 좋아하고, 제가 좋아하니 제자들도 좋아하는 ‘새타령' 한번 해봅시다잉~!”

19일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제27회 방일영국악상에서 수상자 송순섭(가운데) 명창이 이자람(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제자들과 함께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이날 시상식에는 역대 수상자인 이재숙(24회) 명인, 송방송(25회) 한국음악학자, 신영희(26회) 명창과 심사위원인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윤미용 전 국립국악원장, 방일영국악상 20회 수상자인 안숙선 명창, 작곡가 김영동 서울예대 한국음악과 교수, 김영운 국악방송 사장, 내빈으로 윤주영 전 문공부 장관, 권영열 서암문화재단 이사장, 김중채 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장, 정병헌 전 숙명여대 교수, 민일영 전 대법관,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 나세근 변호사, 정창관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정의진 명창, 정석원 전 한양대 교수,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등과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조연흥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종식 전 국회의원, 이영선 연세대 명예교수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