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중구 시청역 3번 출구 앞. 전현직 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의 현수막 10여 개가 가로수를 따라 걸려 있다. 집시법과 그 시행령에 따르면, 집회 중 걸린 현수막은 ‘주장을 표현한 시설물’로 간주돼 경찰과 지자체가 마음대로 수거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김지호 기자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역 3번 출구 앞에 2m 길이 현수막 13개가 내걸렸다. ‘윤석열 XXX는 국가내란범’ ‘김정은의 X 문재인’ 등 전현직 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이었다. 대법관의 얼굴 사진을 내걸고 실명을 거론하며 욕설을 쓴 현수막도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현수막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런 걸 걸어놔도 돼?”라고 했고, 일부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 현수막은 지난달 18일부터 50대 남성 A씨가 내걸었다. 과격한 내용 때문에 인근 주민·직장인 민원이 빗발쳤지만, 경찰과 지자체는 속수무책이다. A씨가 매일 오전 8시부터 밤 11시 30분까지 집회 등록을 하고 현수막을 걸었기 때문이다. 집시법과 그 시행령에 따르면, 집회 중 걸린 현수막은 ‘주장을 표현한 시설물’로 간주돼 경찰·지자체가 수거할 수 없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 초기에는 주말에만 달아 두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주중 낮에도 현수막을 걸었다”며 “정당한 집회 게시물이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는 현수막을 내릴 수 있도록 계도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본지가 지난 3~4일 두 차례 이곳을 찾았을 때 A씨는 없었지만, 현수막은 걸려 있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과격 현수막 관련 민원이 계속되자 중구청은 지난 4일 밤 12시쯤 A씨가 접어둔 현수막을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A씨는 없었고, 집회 등록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현수막을 둘둘 말아 쌓아둔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A씨는 중구청이 현수막을 가져가자마자 비슷한 내용의 현수막을 새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집회를 이유로 새 현수막을 걸면 제지할 방법이 없다.

이곳 외에도 집회를 명분으로 현수막을 거는 ‘유령 집회’는 곳곳에 있다. 경기 용인의 신분당선 동천역 앞에는 경기도의사회가 걸어둔 현수막 80여 개가 1년째 걸려 있다. 지역 국회의원이 발의했던 ‘의사면허취소법’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수지구청에는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민원만 수백 건 접수됐다고 한다. 서울 중구 KT 신관 앞에는 ‘KT 해고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내건 현수막이 5년째 걸려 있고, 서울 서초구 강남역 8번 출구 앞에는 신자유연대가 2년 가까이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모두 집회 신고만 해둘 뿐, 실제 집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찰과 지자체는 “민원이 많이 들어오지만, 모두 신고된 집회에 내건 현수막이라 철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일이 계속되자 서울시는 작년 12월 ‘서울특별시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 산업 진흥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다. 현수막은 집회가 열릴 때만 설치해야 하고, 특정 개인·단체를 비방하는 내용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하지만 현수막 철거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 없기 때문에 실효성은 적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현수막을 철거할 경우 조례보다 상위법인 ‘재물손괴죄’로 문제 될 수 있다”며 “집회 신고자에게 현수막 비용을 물어주거나, 소송까지 당할 위험이 있어 철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유령 집회’를 이용한 현수막 게재를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희훈 선문대 법·경찰학과 교수는 “경찰에 집회 신고를 할 때 현수막 게시에 관한 기준을 논의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만들거나, 현수막 관련 규제 조항을 도입해야 한다”며 “현수막뿐 아니라 소음이나 노숙 집회 등 집회 관련 미비한 규제를 전체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당한 집회의 경우 현수막을 철거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집회까지 엄격하게 기준을 적용할 순 없다”며 “집회 주최자도 도시 미관이나 안전을 고려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