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닳은 손등을/ 오긋이 쥐고 걸었다/ 옛날엔 캠퍼스 커플/ 지금은 복지관 커플.”

성백광(62)씨는 3일 ‘짧은 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성씨의 시 제목은 ‘동행’이다. 아내와 함께한 30여 년을 넉 줄에 녹여냈다. 그는 “1993년 대구의 한 대학에서 아내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며 “시를 배운 적도, 시를 쓰느라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즉흥적으로 쓴 시였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한 세월을 짧게 녹여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대구의 한 역사 교사인 그는 올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3일 대한노인회와 한국시인협회가 주최한 '짧은 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성백광(왼쪽)씨와 최우수상 김행선(오른쪽)씨가 자신이 쓴 시가 수록된 시집을 펼쳐 보이고 있다. /오종찬 기자

대한노인회와 한국시인협회가 주최한 짧은 시 공모전엔 60세부터 98세까지 폭넓은 나이대 어르신이 응모했다. 총 5800편이 제출돼 12명이 당선됐고 대상과 최우수상 시상식이 서울 용산구 대한노인회에서 열렸다. 심사위원들은 “늙음은 단지 숫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분들이 증명했다”고 했다. 문학세계사는 2일 응모작 중 100편을 엮어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최우수상 수상작은 고려대에서 역사학 강의를 하다 퇴직한 김행선(70)씨의 ‘봄날’이었다. “죽음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 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나를 돌아본다/ 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김씨는 “작년 초에 100세가 넘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라며 “어머니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이런 시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시를 좋아해 4년째 공부 중인데, 최근에는 평생학습센터에서 김기중 시인의 강좌를 듣고 있다”며 “늦게 시작한 시 공부인데,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렇게 이룰 수 있다는 걸 다시금 알게 됐다”고 했다.

우수상 수상작인 천봉근(73)씨의 ‘잃은 안경’은 유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할배가 안경을 찾아서/ 여기저기 돌고 있는데/ 네 살 손녀가 찾아 주었다/ 할배 손에 있다고.” 건망증을 겪는 노인의 일상을 담았다고 한다. 천씨는 “시의 영감은 손녀에게서 주로 얻는데, 재작년에 쓴 시라 네 살이던 손녀는 이제 여섯 살이 됐다”고 했다. 그는 “한번은 손녀가 손에 돌을 쥐고 있길래 ‘내려 두어라’ 했는데 ‘돌도 엄마 아빠를 찾아줘야 한다’며 큰 돌 아래에다 뒀다”며 “돌멩이에도 가족이 있다고 믿는 손녀의 동심(童心)이 내 시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천씨는 “진지함보다는 동심 어린 따뜻한 시선, 유머와 위트가 노년의 삶을 위로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고 했다.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에 제출된 작품 100편을 엮어 2일 출간된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문학세계사

이번 공모전 심사는 나태주 시인과 김종해 문학세계사 대표,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맡았다. 기성 시인이 ‘이름값’으로 당선되는 걸 막기 위해 시인 이름과 나이를 가리고 심사했다고 한다. 공모전 당선자 중에 기성 시인은 없었다고 주최 측은 밝혔다.

김종해 문학세계사 대표는 “일상의 소중함이나 가족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아우르는 작품이 많았다”며 “이들은 나이는 단순히 수치에 불과함을 몸소 증명했다”고 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은 “예전에는 시가 청춘의 예술이라는 인식 때문에 20대에 주로 등단했고 30대만 되어도 늦었다고 포기하는 이가 많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시와 함께 여는 사람이 늘었다”고 했다. 그는 “늙었음을 우울하거나 퇴영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재치와 유머로 승화시키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며 “앞으로 노인 문학이 한국 문단의 새로운 기풍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