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대학생 고모(23)씨는 최근 카페 아르바이트로 번 석 달 치 월급 300여 만원으로 K팝 아이돌 그룹 ‘더보이즈’의 앨범 200장을 구매했다. 앨범 한 장을 살 때마다 팬 미팅 응모권을 한 장씩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씨는 팬 미팅에 당첨되기 위해 앨범을 샀지만, 대부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고씨는 “일부 앨범을 중고 거래로 팔거나 주변에 나눠줬지만, 워낙 많이 사서 80여 장은 포장도 뜯지 않고 버렸다”며 “죄책감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최근 K팝 팬 사이에서 앨범을 구매했다가 버리는 이른바 ‘앨범깡’ 문화가 확산되면서 관련 쓰레기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앨범깡’은 특정 가수의 똑같은 앨범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을 뜻한다. 팬들이 앨범깡을 하는 건 음반과 함께 제공되는 포토 카드와 팬 사인회 응모권을 얻기 위해서다. 포토 카드는 아이돌 멤버의 얼굴 사진이 새겨져 있는 종이 카드다. 앨범마다 포토 카드가 두세 장씩만 무작위로 들어 있기 때문에, 팬들은 좋아하는 멤버의 포토 카드가 나올 때까지 앨범을 구매한다. 팬 사인회 응모권은 앨범 한 장당 보통 한 장씩 제공된다. 팬들은 앨범을 여러 장 사 팬 사인회 참석 확률을 높인다고 한다.

포토 카드를 얻거나 팬 사인회에 응모하고 남은 CD 등 앨범 구성품은 대부분 버려진다. K팝 가수가 새 앨범을 낼 때면 기획사 인근 길거리와 지하철 등에 “가수의 앨범이 통째로 수십 개씩 버려져 있다”는 목격담이 나오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앨범 매장 관계자는 “유명 아이돌 컴백 시즌이 되면 매장 앞에 포장도 안 뜯긴 앨범이 수백 장씩 쌓여 있다”며 “특히 빈 캐리어를 들고 박스째 앨범을 샀다가 팬 사인회만 응모하고 버리는 해외 팬을 자주 봤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이 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연예기획사가 앨범 제작에 사용한 플라스틱 폐기물은 2017년 55.8t에서 작년 801.5t이 돼 약 14배로 늘었다.

그래픽=김성규

구매력이 없는 10대들도 앨범 중복 구매에 동참하고 있다. A씨의 고등학교 2학년 사촌 동생은 최근 보이 그룹 NCT의 앨범 20장을 구매하기 위해 용돈 50만원을 썼다고 한다. A씨는 “포토 카드 때문에 앨범을 50만원어치 샀다는 동생의 말에 충격받았다”며 “사진은 온라인으로 공개해도 되는데, 앨범을 사서 실물 포토 카드로만 볼 수 있는 사진을 두는 건 과한 상술”이라고 했다.

K팝 팬들의 앨범 중복 구매·폐기는 연예기획사가 부추긴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기획사들은 앨범 폐기물의 원흉으로 지목된 포토 카드를 다양한 방식으로 팔고 있다. 특정 앨범 판매처에서만 구할 수 있는 포토 카드를 만들거나, 똑같은 음반이 담긴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 중복 구매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K팝의 인기가 늘어나면서 앨범깡이 더욱 확산된 측면도 있다. 이하은(25)씨는 “코로나 전에는 앨범을 20~30장 정도만 사도 팬 사인회에 당첨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해외 팬들까지 유입되면서 불과 몇 년 사이에 K팝 팬덤이 몇 배는 커졌다”며 “이름이 조금이라도 알려진 아이돌은 앨범을 100장 이상 안 사면 팬 사인회는 못 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버려진 앨범 - 지난달 서울의 한 지하철역 내부에 K팝 가수 앨범 수십 장이 버려져 있는 모습. 작년 버려진 앨범에서 플라스틱 폐기물 801.5t이 나왔다.

버려지는 앨범 구성품은 재활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학생 박채원(19)씨는 “요즘 앨범은 단순히 종이와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코팅된 사진이나 여러 재질이 섞인 엽서 등 분리 배출이 안 되는 구성품이 많아서 종량제 쓰레기로 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환경부는 음반 폐기물을 따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플라스틱 및 재활용이 어려운 제품군을 포괄적으로 규제할 뿐 연예기획사 및 음반 업체와 별도로 소통하거나 논의한 바 없다”며 “현재까지 K팝 음반은 환경부가 지정한 과대 포장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앨범을 제작하는 데 친환경 소재 사용을 확대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