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민노총의 불침번? - 지난 16일 밤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 앞 인도를 점령한 채 노숙 시위에 들어가자, 경찰이 줄지어 조합원들 앞에 서 있다. 경찰은 이날 밤새 시민들의 통행로를 확보하는 한편 조합원들과의 충돌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조인원 기자

민주노총은 지난 16~17일 ‘1박 2일 노숙 시위’를 통해 서울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출퇴근길 교통을 마비시켰다. 질서 유지를 위한 공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경찰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교통 위반 딱지는 열심히 떼는 경찰이 민노총 불법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는 시민이 적지 않다. 경찰에서는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인한 업무 과중으로 수사권 붕괴 현상도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경찰의 수사력과 공권력이 모두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8일 “건설노조의 도심 불법 집회로 인해 대다수 시민들께서 큰 불편을 겪은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윤 청장은 민주노총 관계자들을 입건해 수사하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윤 청장의 사과를 ‘만시지탄’으로 평가하며 “민주노총이 만든 무법천지에 경찰이 무기력한 모습만 보였다”는 자성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은 문재인 정권 때 ‘공권력 사용 의지’가 거세당했기 때문”이라며 “원칙대로 대응했던 많은 경찰관이 돈을 물어주거나 사법 처리 등 불이익을 당했다”는 말이 나왔다. 민주노총의 1박 2일 노숙 시위 동안 경찰은 “막을 방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민주노총이 몇몇 불법행위를 했지만, 문재인 정부 당시 느슨해진 집회·시위 대응은 그대로 유지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전에 시위를 금지했던 세종대로 등 주요 도로 집회 제한을 전 정권 때 법원이 모두 풀어줬다”고 했다. 문 정부는 시위 진압 장비인 물대포도 모두 폐기했다. 경찰은 이날 ‘물대포와 같은 장비도 없이 집회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경력을 투입해서 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8월 시민단체 활동가, 민변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 위원회는 용산 철거민 화재 참사, 제주 강정마을 해군 기지 공사 반대 시위, 밀양 송전탑 농성 진압 등 5개 사건을 파헤쳤다. 시위대의 불법보다는 이를 막은 경찰의 법 집행이 적절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조사였다. 위원회는 경찰의 과잉 진압,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백남기씨 사망 사건 처리는 경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5년 11월 민주노총 주도 서울 도심 시위에 참가한 백씨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쓰러져 1년 뒤 숨진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는 경찰의 시위 진압을 문제 삼지 않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검찰은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구은수 서울경찰청장과 신윤균 서울청 제4기동단장, 물대포 살수(撒水) 요원인 한모 경장, 최모 경장을 기소했다.

당시 경찰은 2017년 9월 백씨 유족이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청구인낙서(請求認諾書)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는 백씨 유족 측 주장을 모두 인정한다는 의미다. 당시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다. 경찰 9000명이 기소된 동료를 위해 탄원 서명을 하는 등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소된 경찰관들은 줄줄이 벌금형이 확정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출범한 경찰개혁위원회는 ‘사소한 불법을 이유로 시위를 막지 말라’고 권고했고, 경찰청은 이를 받아들였다. 시위 진압 도중 경찰이 피해를 보더라도 시위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자제하라는 권고도 수용했다. 백남기 사망 사건과 관련해 신윤균 전 서울경찰청 4기동단장과 한모·최모 경장(살수 요원) 등 3명은 백씨 유족 4명에게 1500만원씩 총 6000만원을 지급했다.

2017년 3월 대법원은 쌍용차 불법 점거 농성 진압 과정에 투입된 류모 경찰 중대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민변 소속 변호사가 경찰 호송차를 가로막고 체포된 노조원 접견 요청을 했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아 직권을 남용했다는 것이다. 류씨는 경찰복을 벗었다.

제주 강정마을 사건은 문재인 정부 들어 판단이 뒤집혔다. 2011~2012년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일부 주민이 집회를 벌여 공사가 14개월간 지연됐다. 대법원은 지난 2014년 강정마을 주민·시민단체 활동가 7명에게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시위대에게 청구된 34억5000만원 구상금을 포기하고 41명의 시위대를 사면했다.

한 일선 경찰 간부는 “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경찰의 질서 유지 기능은 완전히 망가졌다”면서 “거꾸로 노조에게 매달리거나 조롱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지난 17일 건설노조는 서울 장교동 서울지방고용청 앞 8차선 도로를 기습적으로 점거하고 집회를 벌였다. 고용청 건물 외벽에 ‘윤석열 OUT’이라는 손바닥만 한 빨간 스티커를 붙이려는 걸 저지하자 노조원들은 경찰들 등에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16일 오후 8시 40분쯤 노조원들이 노숙에 사용할 매트를 서울광장에 반입하는 과정에서 노조원 200여 명과 대치했던 경찰은 “노조 비품이니 경찰은 비키라”는 고성에 물러났다. 이날 노조원들이 반입한 매트는 다음 날 아침 광장 근처와 대한문 근처에 성인 키 높이만큼 쌓였다.

경찰들은 “집회 참가자들이 정해진 장소 등을 벗어나도 주최 측에 ‘이러시면 곤란해요’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것 외에는 집회를 제어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한 일선 경찰서 정보관은 “예전엔 정보관과 상의해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집회가 진행되곤 했는데, 최근에는 ‘우리가 이렇게 해도 경찰은 아무것도 못 하잖아’ 식으로 나온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