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난임 병원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38)씨는 진료가 있을 때마다 새벽부터 ‘오픈런’을 뛴다. 오전 9시에 예약을 해도 환자가 많아 제 시간에 진료를 받을 수 없어 병원문이 열기 전 미리 줄을 서는 것이다. 김씨는 “오전 7시 30분에 병원에 가도 10~30명 대기는 기본”이라 “반차를 쓰거나 유연근무제로 10시까지 출근하는 날에도 일찍 가서 대기하지 않으면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진료 받으러 서울로 원정 간다

난임 시술을 받는 산모는 피검사, 초음파 검사, 각종 주사 시술 등을 위해 한 달에 7~8번은 내원해야 한다. 직장인 산모들은 출근 전 혹은 점심시간에 간단한 진료를 받으려 오픈런을 하고, 난자 채취나 배아 이식 등 진료가 길어지는 날엔 휴가를 써 병원을 찾는다. 난임 인구에 비해 난임 시술 전문 병원이 부족하고, 경험 있는 의사 수도 한정된 탓이다. 2022년 12월 말 기준 전국 난임시술병원은 272곳인데, 전국적으로 난임 시술을 받고 있는 난임 부부는 7만쌍 안팎이다. 난임 병원 200여곳 중 130곳이 서울·경기·인천에 몰려있어 서울과 수도권 산모들은 병원 다니기가 그나마 편하다. 하지만 부산·대구·광주·대전·울산 등 대도시에 60곳이 쏠려있어 병원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다. 전국 출산율 1위라는 세종시에도 난임 전문 병원은 3곳 뿐이다.

난임 병원이 없거나 적은 지역에 사는 난임부부는 시술을 받기 위해 원정 진료를 간다. 진주시에 사는 김모씨는 2018년 난임 시술을 시작할 때 서울역 난임 병원으로 왕복 14시간을 오가며 시술을 받았다. 진주에는 난임 전문 병원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한 달에 6번, 길에서 약 84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교통비만도 수백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작년 말 남자 아이를 출산했지만, 김씨는 “원정 진료를 받으러 다녔을 때는 전쟁 같았다”며 “서울로 시술 받으러 가는 날은 하루를 통째로 난임 시술에 써야 했다. 이렇게 힘들게 오가다보니 결과가 안 좋으면 기분이 더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고 했다.

◇병원 없어 14시간 반 왕복.. “눈치 보여” 퇴사 택하기도

공무원과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회사에 난임 시술을 위한 휴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일과 시술을 병행하며 버티다 퇴사를 선택하는 산모도 많다. 작년 9월부터 난임 시술을 받기 시작한 직장인 윤진숙(39)씨는 충북 보령에서 경기 동탄까지 난임 시술 위해 한달에 8번씩 왕복 3시간반을 오간다. 보령 근처에는 난임 전문 병원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윤씨는 “직장에 난임휴가 없어 시술을 위해 연차를 전부 끌어썼다”며 “회사에 누가 되지 않으려 해도 남들보다 휴가를 더 자주 써야하니 직장과 치료 병행하기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난임 시술을 받는 공무원은 최대 2년까지 난임 휴직이 가능하고, 난임 휴가도 1~4일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1년에 3일까지 난임 휴가를 쓸 수 있고, SK하이닉스는 난임 시술 휴가를 최대 5일로 늘리고 의료비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과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난임 휴가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거나, 난임 휴가 자체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난임 휴가가 없는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화진(27)씨는 2020년 난임 시술을 받다가 일을 그만 뒀다. 노씨가 사는 안산시에는 난임 시술 전문 병원이 없어 용인시에 있는 병원을 왕복 2시간 걸리며 오가야 했기 때문이다.

2022년 5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난임시술 과정에서 퇴사한 경험은 94%, 정규직의 경우 60%에 달한다. 중복 응답이 가능한 퇴사 이유에 설문에서 59.3%는 ‘난임시술을 위해 계속 개인 휴가를 사용하기 어렵거나 사용할 수 있는 휴가제도가 없어서’, 47.8%는 ‘난임시술 때마다 상사나 동료의 눈치가 보여서’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난임 휴가는 당연히 줘야하고, 눈치 보지 않는 분위기 만들어야 출산율 늘어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