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 검사입니다. 선생님 계좌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자금 세탁에 사용돼 현재 70건의 고소장이 들어와 있는 상태인데 수사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도권의 40대 중반 의사 A씨는 지난 6월 말 이 같은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검사라고 소개한 사람은 발부된 구속영장 문서 파일까지 보내며 “이미 영장까지 나왔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 수사를 하고 협조를 잘 하면 약식 조사로 갈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보이스피싱범이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사칭하며 피해자에게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낸 가짜 신분증과 가짜 구속영장 문서 파일./경찰청

A씨가 사실 확인을 위해 금융감독원, 검찰청, 경찰청 등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계좌가 자금 세탁에 활용됐다” “수사 대상에 올라있다”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검사를 사칭한 일당이 “수사에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며 보낸 인터넷 링크를 클릭한 게 화근이었다. 그 탓에 피해자 휴대전화에 악성앱이 깔려서, A씨가 금감원이나 경찰청 등에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중간에서 전화를 가로채 각 기관의 직원인 척 A씨를 속인 것이다. 그의 휴대전화에도 그가 실제 금감원에 전화를 건 것처럼 표시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잘못하면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A씨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걸 눈치챈 범죄 조직 일당은 본격적으로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이미 구속영장까지 발부돼있어서 대출이 안 될 거다. 본인 명의가 범죄에 연루됐는지 확인해보는 차원에서 한 번 대출을 받아서 송금을 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A씨는 실제 그렇게 했다.

그다음 범죄 조직은 A씨의 예금과 보험 계좌 등을 노렸다. “당신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전부 범죄 자금 아니냐” “우리가 직접 그 돈을 검증해봐야 한다”는 식으로 속이고 그 돈을 인출해 오라고 했다고 한다. 한번에 거액의 돈을 출금하는 A씨에게 은행 창구 직원이 사용 목적을 물었지만 A씨는 “병원 직원 월급으로 지급할 돈”이라고 했다. 검사 사칭 일당이 은행에 이렇게 답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일당은 가상화폐(코인)를 구입해 돈을 송금하라고 했고, A씨는 그 지시에도 따랐다. 경찰 조사 결과 이런 방식으로 A씨는 약 3주 만에 41억원을 뜯긴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스피싱 범죄로 개인이 입은 단일 피해액으로 역대 최고액인 것으로 전해졌다.

22일 경찰청은 이 같은 수법의 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실제 올해 1~7월 유형별 보이스피싱 발생 추이를 보면 이런 식으로 기관을 사칭한 형태의 사기 비율이 전체의 37%에 달해 지난해 같은 기간(21%)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경찰은 “‘나는 안 당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지만 수사 기관을 사칭하는 강압적인 목소리에 심리적으로 지배를 당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며 “수사기관은 영장이나 공문서를 메신저를 통해 보내지 않는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링크를 눌렀다가 악성 앱이 설치될 수 있으니 절대 눌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