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에 사는 김은숙(71)씨는 최근 자기가 사는 동네에 있는 복지관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향서)’를 써내기로 마음먹었다. 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 향후 임종 과정의 환자가 됐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를 받지 않거나 중단함으로써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서류다.

김씨는 10년 넘게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친언니를 떠올리며 이 서류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회복될 가망이 없는데 발달한 의료 기술에 의지해 숨만 이어가는 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가란 고민이 들었다”면서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모르는데 미리 이런 서류를 만들어 대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최근엔 남편과 장례식 부고장에 ‘밝은 옷을 입고 웃으며 와달라고 쓰자’는 얘기를 나눴다”며 “죽음에 대해 내가 결정한 대로 실천할 생각을 하니 주체적으로 사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 2009년 6월 서울 신촌 연세대의료원에서 1년 4개월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연명치료를 받아 온 77살 김모 할머니에 대한 존엄사가 집행되기 전 의료진과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다./전기병 기자

이른바 100세 시대, 늘어난 수명만큼 ‘존엄한 죽음’ 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15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며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지난 6월 말 기준 전국 135만명에 육박한다. 최근 해마다 20만~30만명 안팎 늘고 있다.

복지센터 등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법이나, 유언장을 미리 쓰고 묘비명을 정하는 이른바 ‘웰다잉’(존엄한 죽음) 수업에 참여하는 어르신도 많다. 지난 7일 오후 2시쯤 서울 도봉구 창동어르신복지관의 한 강의실. 60대 후반~80대 중반에 이르는 어르신 11명이 왜 ‘웰다잉’ 준비가 필요한지에 관한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사로 나선 복지관 관장 박미연씨가 “어르신들 오늘 여기 어떻게 오시게 된 거예요?”라고 묻자, 한 어르신이 “준비 없이 죽으면 당황스럽잖아!”라고 대답했다. 이 농담에 어르신들은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수업은 10주간 진행되는데 영정 사진을 찍고 유언장 미리 써두기 등을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향서)가 뭔지도 알려준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박모(86)씨는 “10년 전에도 복지관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이번엔 의향서에 관해 설명을 듣고 쓰고 싶어 다시 수업 들으러 왔다”며 “잘 배워서 집에 있는 우리 영감한테도 알려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모(82)씨도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침대에서 오래 누워 살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 의향서를 쓰러 왔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최근까지 의향서를 작성한 134만여 명 가운데, 60세 이상 어르신은 약 118만명에 이르고 있다. 의향서를 쓰는 어르신들은 품위 있게 죽는 게 자신이 원하는 삶의 마무리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주변 사람의 투병이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3년 전 암으로 남편과 사별한 김영자(75)씨는 남편을 간병하는 동안, 내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면 누가 보살펴줄까 하는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녀들도 가정이 생기고 아이를 키우면서 배우자와 자기 자녀가 있는데, 짐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의향서를 썼다. 김씨는 “내 인생을 기록한 자서전을 공책에 써놨는데, 의향서를 거기에 꽂아두고 자녀들이 올 때마다 보여준다”며 “처음에는 건강한데 왜 이런 걸 하셨냐며 불편해하던 자녀들이 이제는 이게 엄마의 진짜 마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준비가 없었다면 죽음이 두려웠을 것 같은데 지금은 두렵지도 않고 마음도 너무 홀가분하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향서 작성을 홍보하는 건 국민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존엄한 마무리를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로 지원하자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아예 다른 노인들에게 의향서를 쓰는 법을 알려주는 상담사로 나선 사람들도 있다. 서울 도봉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김미자(68)씨는 요즘 가게를 찾아오는 어르신 손님에게 의향서가 무엇인지, 어떤 이유에서 이런 제도가 만들어졌는지 설명하는 연습을 한다. 김씨는 37세 때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낸 뒤 죽음이라는 것이 생각만 해도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책을 읽다 우연히 자기처럼 누군가와의 이별로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게 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돼, 자기의 트라우마도 이겨내고 다른 사람의 죽음 준비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김씨는 “어르신들 대부분이 이런 서류가 있다는 걸 알면 관심을 보인다”며 “다른 이의 죽음이 존엄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게 돼 보람차다”고 말했다.

죽음교육전문가라는 민간 자격증을 따면서 자신의 죽음 준비를 하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공부를 하는 어르신도 있다. 작년 말 자격증을 딴 서울 도봉구에 사는 김종윤(67)씨가 그런 사례다. 그는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경험하지 못한 죽음과 그 준비를 가르칠 수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수록 지금 현재에 집중하며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어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임병식 고려대 죽음교육연구센터장은 “코로나로 갑작스럽게 죽거나, 가족을 애도하지 못하고 보내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최근 죽음과 그 준비에 관해 미리 생각하고 대처하려는 노인들이 더 늘어났다”며 “죽음을 준비한다고 하면 마치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